참기를 잘 했다.

by 할미꽃

내가 늘 다니는 산책길 끝자락에 외딴집 한 채가 있다.

나지막한 언덕 가운데를 가르마처럼 갈라놓은 하얀 새길이 생겼다.

가시 철망으로 얼기설기 엮어놓은 엉성한 출입문이 길의 끝임을 알려 주었다.

판자 쪼가리에 농원이라고 아무렇게나 쓰인 팻말이 가시철망에 걸려 있었다.

언덕과 숲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집이 철망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집은 있는데 드나드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어느 봄날이었다. 양쪽으로 생겨난 하얀 둔덕이 초록색으로 변해 있었다.

모를 부어놓은 듯이 봉숭아, 코스모스, 맨드라미, 활련 가지가지 꽃나무 싹들이 빼곡하게 언덕을 덮고 있었다.


종묘 가게에 가서 사다 심은 씨앗이 제대로 싹을 틔우지도 못한 채 흙 속에 묻혀버려 아쉬웠던 마음이 되살아나

'한두 뿌리 뽑아 갈가' 하는 곱지 않은 마음이 동했다.

논바닥에 가득한 "모"처럼 촘촘한 모습을 바라보며, 더러는 솎아 주는 게 좋은 일이라고 스스로 합리화도 해 보았지만 선뜻 손을 뻗을 수는 없었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이었다. 처음으로 그곳에서 사람을 보았다. 중년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비를 맞으며 꽃모종을 떠내고 있었다.

나는 다가가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꽃모종 좀 얻어 갈 수 있을까요?"

그 여인은 댓구 대신 미소를 보이며 주섬주섬 꽃 모를 떠냈다.

"맨드라미도!" 혼잣말을 하며

이것저것 챙겨 내 손에 쥐어줬다.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잘 키우겠다는 말까지 하고 서둘러 발걸음을 집으로 향했다.

손에 들린 푸짐한 꽃모종을 보며 보석을 안은 듯 마음이 뿌듯했다.

'그래 모든 일이 다 때가 있는 거야. 참기를 잘 했지. 몰래 뽑아 왔더라면, 겁에 질려 겨우 한두뿌리 밖에 못 가져 왔을 텐데.... 그뿐이겠는가. 꽃이 피어도 그 속에 내내 몰래 가져왔다는 거북한 마음이 함께 보일텐데,,,‘ 다시 올곧은 마음으로 나를 다스렸다.


참아 내는 힘, 기다림 끝에 이루어지는 소망들을 가슴 속에 심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