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여름 땡볕에 누군가는 선선하다 못해 콧물을 훌쩍이도록 추운 에어컨 밑에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불과 1개월 전의 내가 그랬다. 나름 일하는 게 재미도 있었고, 나름 인정도 받으며 잘 해내고 있었으나, 직장생활 1년 9개월 만에 가슴속에 품고 있던 사직서를 냅다 날리게 되었다. 분명 사직서를 날리는 그 순간에는 툭치면 기계처럼 쏟아낼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수백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까마귀 고기를 먹은 것인지 백수가 된 지 약 한 달만에 왜 그렇게 힘이 들었는지, 왜 그렇게 일을 그만두어야 했는지 이유가 희미해진다.
그럴 땐 퇴사한 옛 직장동료들을 만난다. 누가 들으면 회사생활 몇십 년은 한 것 같지만, 여하튼 그때의 우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래 그랬지, 나 지금 되게 행복하네.'라고 다시금 정신을 차리게 된다. 그리곤 맥주 한 잔 마시며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하여 골몰히 생각한다. 어쩌면 마냥 어리지도, 그렇다고 어마어마하게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닌 이제 갓 이십 대 후반이라는 어정쩡한 나이의 내가, 왜 지금 이 타이밍에 퇴사를 해야 했는가에 대하여 말이다.
성향 때문인가?
나의 MBTI는 ENFP(이하 '엔프피'라고 칭함)이다. 우리 엔프피들은 유행하는 것들은 다 해봐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나는 자랑스러운 엔프피로서 SNS는 블로그, 인스타, 페이스북, 유튜브, 브런치까지 유행하는 모든 것은 다 해봤다. (물론 끈기는 없다.) 유행하는 다이어트법도 다 해봤다. (물론 다이어트는 성공하지 않았다.) 유행하는 공부법도 다 해봤다. (물론 공부를 썩 잘하진 않는다.) TV에서 자주 보이는 물건들은 무조건 사고 본다. (그렇다. 나는 소비 요정이다.) 그래서 그런지 남들 다 해보는 퇴사도 꼭 해봐야겠더라. 음... 이건 너무 철없는 소리 같으니 다른 이유를 찾아본다.
적성에 맞지 않았나?
대학교를 졸업하고 정확히 한 달만에 입사를 했다. 취업에 대해 너무도 무지했던 탓에 사실 이력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작성해봤고, 면접도 2번밖에 보지 않은 채 덜컥 입사를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순간 내가 회사원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입사를 한 후에야 진로를 고민하고 있는 한심한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끊임없이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어떤 것을 잘 해내는 사람인지에 대하여 고민하고 이것저것 많이도 해봤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 생각하지만 아직도 내 적성은 찾지 못했다. 다시 말해, 내가 했던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는지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운명인 건가?
몇 가지 이유를 떠올려도 결론을 찾지는 못했다. 이미 벌어진 일. 그저 "운명인가 보지!"라고 정신승리를 하는 편이 빠르겠다. 그래, 그렇게 될 운명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백수가 된다. 몇십 년을 일하든 몇 개월을 일하든 결국엔 회사를 나오게 된다. 그런데 내가 27.5살이라는 어정쩡한 나이에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건 어쩌면 한 번쯤은 "무언가가 되기 위해 노력을 해봐야 하지 않겠니?"라고 저 하늘 위 누군가(나는 무교이다.)가 터닝포인트를 선물해준 건 아닐까 하고 구차하게 포장을 해본다. 무언가라도 해볼 수 있는 지금 이 타이밍에 백수가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인생에 있어 다시없을지 모를 이 휴식이자 기회를 길고 길게 만-끽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