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명산 네 번째
지난 2월 25일 팔공산 종주를 다녀오고 나서 100대 명산을 1년에 20곳씩 5년 만에 다 돌아보겠다는 처음의 생각을 고쳐 먹었다. 다녀보니 기회가 되면 꼭 다시 한번 와 보고 싶은 곳도 있고, 산마다 제일 아름다운 계절이 있는데 그때를 보지 못하게 되면 아쉽기도 해서다. 그리고 해파랑길 50구간을 달리기 여행으로 종주하려는 계획을 병행하려면 한 달에 산 두 곳과 해파랑길 두 곳은 아무래도 무리일 듯하다.
무학산은 진달래 꽃이 장관이라 하여 그 시기를 맞춰 갈까 했으나 그러지 못하고 3월 18일에 다녀왔다. 그래도 울산보다는 남쪽이라 산 아랫자락엔 제법 진달래꽃이 피어있어 조금은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이번 산행은 전날 마신 술이 덜 깬 친구와 함께 하였고, 숙취에도 불구하고 무난히 다녀올 정도로 걷는데 별 취미가 없는 사람도 즐길 수 있는 산이었다.
코스는 만날공원 주차장에서부터 '최치원의 길'로 이름 지어진 둘레길을 따라 약 4.5km 정도의 아기자기한 오솔길을 지나, 서원곡유원지와 백운사를 지나 무학산 정상까지 약 2km 정도의 오르막 산행길 그리고 정상에서 안개약수와 대곡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길 약 3.5km를 내려와 만날공원으로 다시 돌아오는 원점 회귀 코스로 다녀왔다.
지도상으론 거리가 약 10km 정도 되었지만 폰의 GPS상으론 약 13km, 휴식을 포함한 총 산행시간은 6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마산은 내 젊은 날 한 때 뭘 해도 안 되는 아버지를 믿고 나와 내 친구 둘은 마산 경남대학교 앞 어느 조그마한 방 한 칸을 얻어 세 놈 이서 몇 달간 자취를 하며 지낸 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은 결국 사기로 끝났고, 취업기회를 가져야 할 중요한 시기의 친구들에게서 기회를 뺏어버린 것에 대해 마음 한편엔 항상 부채의식이 있어 즐겁지는 않은 곳이기도 하다.
그래도 가끔 그 친구들과 마산 MBC뒤편에 쭉 이어진 홍등가와 그 가계 앞에 나와 유혹의 몸짓을 하는 날개옷 입은 아가씨들을 똑바로 쳐다보기 부끄럽고 무서워 차로 얼른 지나가며 곁눈으로 구경하던 그때를 이야기하며 웃기도 한다.
앞의 금정산과 팔공산은 혼자 다녀왔고, 이번엔 친구 한 명과 동행했다. 산은 혼자는 혼자대로, 같이는 또 같이대로 즐기는 맛이 다르다.
우리는 만날공원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무학산 둘레길을 따라 천천히 올랐다. 둘레길은 임도 같이 넓은 길이 아니라 오솔길 같은 아기자기하고 짧은 오르막과 평지로 구성된 걷기에 참 좋은 길이었다. 아내가 있었다면 같이 걷고, 마산 아귀찜도 먹고 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아쉬움에 괜히 친구에게 몇 번이나 너는 다음에 너희 집사람이랑 다시 와서 걷고, 맛있는 것도 사 먹어라 말했다.
겨울산은 비록 나무는 죽은 듯 앙상한 가지만 남기고 있지만 대신 시원한 조망을 우리에게 준다. 무학산 둘레길 사이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바다는 탁 트인 시원한 동해와는 달리 강인 듯 아닌듯하고, 도심과 어우러져 있는 풍광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서로의 이야기가 끊길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고, 둘레길도 끊어질 듯 모퉁이 돌면 다시 예쁜 오솔길이 수줍게 이어진다. 그리고 길 양옆은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진달래꽃이 소복소복 피어있어 한 주만 더 뒤에 왔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꽃구경에, 길구경에 어느새 우린 서원곡유원지에 도착했다. 여기서는 등산객들이 많다. 우리도 서원곡유원지에서 무학산 정상까지 가는 코스로 왔었다면 이곳에 주차를 하고 출발했으리라. 화장실에서 급한 용무를 마치고 백운사를 지나 본격적인 산행길에 접어들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무학산을 검색하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365 계단이다. 계단에 1월 1일부터 하루씩 날짜를 더해간다. 처음부터 365개 계단을 계획하고 만든 건지 어찌하다 보니 그리 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계단을 오르는 고됨과 지루함을 달래주기엔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다.
365 사랑계단이 끝나자 이번엔 365 건강계단이 버티고 있다. 건강계단은 한 계단의 폭이 넓어 한 폭에 넘기엔 조금 넓고 두 폭에 넘긴 조금 짧은 뭔가 불편하다. 마지막 12월엔 계단이 모자라 그랬는지 양갈래길 계단을 합해야 365가 되니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그냥 하나만 하고 말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계단 끝은 정상으로 연결되고 정상에 마련된 의자엔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뭔가를 열심히 나눠먹고 있다.
남자는 참 재미없는 동물이라는 생각이 이런 곳에 올 때면 항상 든다. 여자들은 항상 즐겁게 웃고, 맛있게 먹고, 얼굴엔 즐거움을 한껏 나타내지만 남자들의 표정은 뭔가 모르게 다들 심각하다. 웃어도 가끔씩 웃을 뿐, 그마저도 일행 중 여성이 한 사람이라도 있을 때뿐이다. 특히나 그중 제일갑은 바로 나다.
정상에 설치된 등산안내도에 학 모양을 그려두고 산과 대비 시켜두었다. 난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학 모양이 어떻게 상상되는지.
조망안내도에는 거가대교와 거제도까지 보인다하나 오늘은 시계가 나오지 않아 보이질 않는다. 오밀조밀 섬들이 이어진 남해. 예전에 딸들과 함께 본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 극 중에 '섬들은 바다로 이어져있다'는 대사가 나온다. 바다 때문에 고립되어 섬이다. 섬과 섬도 바다로 인해 서로 떨어져 있다. 그러나 바다를 이용할 수 있는 자에게 섬은 오히려 바다로 이어져 있단다. 우리의 일도 그와 같지 않을까, 안 되는 이유가 되는 이유로. 어떤 관점과 기술이 있느냐에 따라서.
무학산 정상을 뒤로하고 대곡산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크게 경사가 없이 무난한 내리막이다. 안개약수터를 알리는 갈림길에서 어디로 가야 하나 약간 고민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서로 만난다. 걸음의 속도에 반비례하게 이야기는 이어진다. 이것이 함께하는 산행의 맛이지 않나 싶다.
안개약수터를 조금 지나 넓게 탁 트인 조망이 나오는 바위가 있다. 친구는 햇빛을 피해서, 나는 햇빛을 찾아 앉아 한참을 멍 때렸다. 영화에 보면 스님들이 이런 곳에 앉아 참선을 하는 게 다 이유가 있다 싶다.
눈 아래엔 티본스테이크처럼 생긴 마산해양신도시가 한눈에 내려 보인다. 토목공사는 끝난 것처럼 보이는데 아직 그 위엔 아무것도 없다.
멍 때리긴 그만하고 다시 발걸음을 대곡산을 향해 옮겼다. 우리가 쉬었던 곳에서 조금만 더 가니 대곡산이다. 이곳 무학산에서는 거리감이 사라진듯하다. 천천히 걸어서 그런지 아무튼 그렇다.
만날고개 이정표가 있어 그쪽으로 내려가려다 조금 더 가보니 출렁다리가 나온다. 다리 길이가 짧아 출렁의 느낌은 별로 없으나 그래도 출렁다리다. 우리의 여정은 이곳 출렁다리를 끝으로 휴식을 포함한 약 6시간의 산행을 모두 마쳤다.
만날고개 아래에 만날고개 전설을 알리는 설명이 있다. 내용은 윤씨댁으로 시집을 온 새댁이 고진 시어머니 구박에도 지극정성이었고 친정어머니 병환이 걱정되어 시어머니 몰래 남편이 만날고개를 지나 친정에 다녀오라 하였단다. 기다리던 남편이 시어머니 구박에 불쌍한 각시에게 새 삶을 살라면서 자신은 돌에 머리를 박고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난 왜 이리 이상하지. 당시에 새 삶이 어찌 가능한가. 오히려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며 구박이 더 많아지겠지. 그걸 모를 리 없는 남편의 자살이라. 납득이 안 간다. 내가 다시 각색하면 만날고개에서 기다리던 신랑이 막걸리를 너무 많이 마셔 넘어져 돌에 머리를 찧어 사고로 죽었다면 모를까. 내가 너무 삭막한가. 마산분들에게 욕먹겠다.
주차장 입구에 올라갈 땐 보지 못했던 시비가 있다. 천상병 시인의 시 '새'를 돌에 새겨두었다. 천상병 시인이 경상도 분이라는 건 알았으나 마산인 줄은 몰랐다.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이 너무나 가슴 아려 제대로 읽을 수 없었는데. 또 아내가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캘리 작품으로 만들었고, 아내가 떠난 후 그 '귀천'과 천상병이란 이름을 기억에서 지우려 했는데 이곳 무학산에서 다시 시인의 작품을 보니 아내 생각에 가슴이 미어진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못난 나를 만나 하루도 마음 편히 살아보지 못했을 님이여.
부디 소풍 끝내고 간 그곳에서 아름다웠다고 말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