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명산 일곱 번째
본격적인 여름이 오기 전에 계곡 여행 겸, 경북 포항 내연산에 다녀왔다. 보경사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12 폭포를 모두 보고 향로봉, 삼지봉, 문수봉을 돌아 원점으로 돌아오는 약 20km , 7시간 정도의 일정으로 산행을 계획했다.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삼각김밥 3개를 배낭에 담고 아침 9시 반경 보경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은 벌써 관광차들과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상점가 뒤로는 첩첩이 산들이 묵묵히 서 있다. 나도 산악회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보경사까지 함께 걸었다. 보경사 일주문 뒤편 매표소에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명산 앞에 있는 유명사찰과 등산객들이 입장료 문제로 오랜 세월 갈등을 빚어 온 것이 이제야 해결된 모양이다. 그동안 사찰을 보러 온 것도 아닌데 등산을 하기 위해 잠시 앞을 지나가는 것만으로 입장료를 내야 한다는 것이 불편했었는데 이제야 마음 편하게 산을 오르게 되나 보다.
보경사 산문을 지나 절 마당 앞 광장에 포항산악연맹에서 설치한 안내도가 있다. 일반 지도로는 전체적인 산세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을 사실적 그림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 마음에 쏙 든다.
안내판에서 약 15분 정도 걸으니 폭포 방면과 문수암 방면으로 갈리는 갈림길이 나온다. 산을 먼저 보고 내려오면서 폭포를 볼까 잠시 망설이다 구경도 힘 있을 때 해야 한다 싶어 첫 마음대로 폭포먼저 보기로 했다.
갈림길에서 5분 정도 걷노라면 첫 폭포인 상생폭포가 나온다. 예전에는 쌍폭이라 불렸다는데 지금은 상생폭포로 불린단다. 내가 보기엔 쌍폭이 더 직감적인데 두 물줄기가 경쟁하지 않고 서로의 길로 가는 것이 ‘같이 산다’하여 상생인가 생각해 본다. 그리 높지 않은 폭포임에도 폭포 아래는 엄청 깊다. 구명튜브를 준비해 둔 게 다 이유가 있다 싶다.
상생폭포를 뒤로하고 4분 정도 가니 이번엔 보현폭포가 나온다. 오른편 언덕 위 보현암에 근거한 이름이란다. 그런데 이 보현폭포는 안내판은 있으나 폭포는 보이질 않는다. 계곡으로 내려가 바위 위에 아슬아슬 서서 바위 옆을 비켜 보면 보일 듯 말 듯 보이는 것이 보현폭포인가 보다. 보통의 수직으로 내리 쏟아지는 폭포와는 달리 바위틈을 미끄럼틀처럼 내려온다. 이게 맞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안내판 앞에는 이것뿐이니 맞겠지.
이번엔 세 번째 삼보폭포다. 이 폭포도 등산로에서는 보이질 않는다. 표지판에는 200미터라 되어있어 계곡으로 내려가 보았다. 어릴 적 학교 소풍에서도 보물 찾기에는 영 잼뱅이였는데 여기서도 그렇다. 못 찾겠다, 포기하고 올라오자니 다른 사람들은 내가 간 길이 아니라 다른 길로 간다. 일단 따라갔다. 여긴가 보다, 안내판엔 물길이 세 갈래라는데 수량이 적어 그런지 두 갈래만 내온다.
폭포가 어찌나 자주 나오는지 돌아서면 폭포요 돌아서면 폭포다. 지루할 새가 없다. 이번엔 네 번째 잠룡폭포다. 잠룡폭포도 등산로에서는 잘 보이질 않는다. 전망데크에서 나무 틈으로 겨우 보이는 게 다이다. 폭포 아래 물속에 승천하지 못한 용이 살았다 하여 잠룡폭포라 하니, 너무 쉽게 보여 용이 승천하지 못하면 안 될까 하여 수줍게 감춰져 있나 보다.
잠룡폭포 바로 위가 다섯 번째 무풍폭포다. 무풍폭포는 높이가 높지 않은 것도 있지만 바로 위 관음폭포를 에워싼 바위절경과 도저히 자연이 만들었다 믿기지 않는 절경에 취해 놓치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어찌 보면 내연산 폭포 최고의 절경은 바로 여섯 번째 관음폭포가 아닐까 싶다. 깎아지른 바위와 석굴을 연상케 하는 바위동굴 그리고 그 사이로 쏟아지는 폭포수를 보노라면 몸이 저절로 뒤로 넘어가는 위압감마저 든다. 쏟아지는 물소리를 집중해서 들으며 바위동굴에 앉아 수행한다면 저절로 도통하지 않을까.
관음폭포 위 연산구름다리로 올라가면 일곱 번째 연산폭포가 나온다. 연산폭포는 일반적인 폭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가장 닮았다. 높이 하며, 폭포 옆을 에워싼 바위 절벽하며 모든 것이 폭포스럽다. 다만 아쉬운 것은 관음폭포를 보고 바로 보게 되니 연산폭포 자체를 온전히 감상하기엔 앞의 감흥이 남아있는 것이 조금 미안하다.
연산구름다리로는 등산로가 이어지질 않는다. 다음 폭포로 가기 위해서는 다시 내려와 관음폭포 앞으로 난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가파른 계단을 한참을 오르고서 만나는 산길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질 않는 모양이다. 길이 점점 희미해진다. 계곡길이란 항상 계곡을 이리로 저리로 건너가기 마련이다. 길이 희미해지는 것이 물을 건너야 하나 보다 할 때쯤 계곡 중간에 웬 사내가 서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저쪽으로 가란다. 내가 보기엔 그쪽은 길이 아닌 듯한데. 내가 그 사람에게 물었다. ‘혹시 위에서 내려오는 길입니까?’ ‘아니요. 저도 올라가는 길입니다’ 헐 이 양반은 등산길을 모르는 사람인 듯하다. ’어디까지 가세요?‘ ’ 글세요 향로봉으로 해서 한 바퀴 돌아볼까 합니다. 그런데 어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보기엔 그분은 12 폭포만 보고 내려가는 것이 옳은 판단일 듯하다. 배낭을 메고 있는 모습만 봐도 초보 등산객인 듯한데 아무리 못 잡아도 앞으로 15km 이상은 더 가야 할 텐데 저 모습으로는 도저히 안될 듯싶다. ’조심히 산행하세요 ‘ 인사하고 서둘러 길을 떠났다.
이번엔 여덟 번째 은폭포다. 이 폭포도 등산로에서 잠시 계곡 쪽으로 내려가면 잘 볼 수 있다. 여성의 음부를 닮았다 하여 음폭포라 불리다가 상스럽다 하여 은폭포로 고쳐 불렸단다. 남근석, 여근석도 있는데 뭐가 어떻다고, 오히려 음폭포로 스토리텔링을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오지 않을까?.
이제 서서히 상류로 접어드니 다음 폭포를 만나는 간격도 멀어지는 것 같다. 길도 조금씩 험해지고 등산을 겸해서 오지 않는다면 대부분 관음폭포에서 돌아가지 싶다.
아홉 번째 북호1폭포를 만난다. 이번에도 등산로에서 80미터를 계곡 쪽으로 내려가면 만날 수 있다. 호랑이가 쉬었다 하여 북호란다. 정말 호랑이가 쉴 수 있게 폭포 위가 펑퍼짐한 것이 쉬기에 딱이다.
북호1폭포 바로 위에 북호2폭포가 있다. 여기도 호랑이가 잘 나왔다 하여 이름 지었다 한다. 우리네 동네 이름도 1동, 2동하며 번호로 붙여 나가는 것이 재미없는데 폭포에도 1, 2 번호를 매겼다. 조금 상상력을 보태 이름을 지어주지 아쉽다.
이제 폭포도 점점 끝을 향해 가는 것 같다. 열한 번째 실폭포는 향로봉으로 가는 등산로에서 한참을 벗어나 300m나 데크길과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나온다. 실타래를 풀어 내리듯 가느다랗다고 실폭포란다. 가느다란 실폭포 옆으로난 계단을 올라가면 혹여 시명리로 가는 등산로와 연결이 되는가 싶어 올라가 보니 막다른 길이다. 다만 위에도 아래보단 높이가 낮지만 가느다란 폭포가 있다. 이 둘을 합쳐 실폭포라고 하는가 보다. 계단을 다시 내려와 애초의 삼거리로 다시 내려와 향로봉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실폭포를 지나면서는 완전한 등산길에 접어든 듯하다. 길도 가팔라지고, 좁아진다. 10여분을 가니 마지막 열두 번째 시명폭포 안내판이 나온다. 이 역시 등산로에서 150m 아래에 있단다. 이쯤 되면 힘도 빠지고 그냥 넘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래도 지금까지 왔는 게 아까워 시명폭포를 보기 위해 아래로 내려갔다. 여긴 확실히 사람들이 잘 찾지 않나 보다. 낙엽이 쌓여 어디가 길인지 분간도 어렵다. 무작정 계곡을 향해 내려오니 조그만 화살표가 시명폭포의 방향을 알려준다.
이 표시가 없었다면 찾는데 애를 먹었지 싶다. 계곡 아래 방향으로 무작정 내려가니 아마도 여기가 폭포지 싶은 것이 나온다. 지금은 없어진 화전민촌인 시명리 마을 어귀에 있다 하여 시명폭포란다. 시명폭포를 보니 옛날 화전민들의 팍팍한 살림살이가 눈에 선하다. 고된 삶의 땀을 이곳 시명폭포 물에 씻어내며 위안을 삼았으리라.
이 열두 번째 시명폭포를 끝으로 폭포는 모두 본듯하다. 다만 내가 본 폭포가 모두 맞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젠 틀려도 할 수 없다. 다시 등산로를 타고 한 시간여를 가니 갈림길 이정표가 나온다. 시명리와 향로봉으로 갈리는 지점이다. 아무 생각 없이 향로봉으로 향했다. 여기서 시명리방향으로 갔어야 한다. 그러면 시명리를 거쳐 향로봉 정상으로 가는 길이 나올 것이다. 내가 선택한 길은 사람이 다닌 흔적도 별로 없고 오르막은 왜 이리도 길고 지루한지 잠깐씩 나무 사이로 보이는 산세를 보아도 정상과는 계속 멀어지는 듯 하니 마음이 불안하다. 내려오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물어볼 텐데 사람이라곤 나뿐이다. 낯선 침입자가 궁금한 날벌레들이 눈으로 눈으로 날아들어오는 통에 내 눈꺼풀에 잡혀 먹힌 날벌레로 배가 부를 지경이다. 더는 날벌레를 피해 땅만 보고 걷기에 지쳐 고글을 쓰고 나니 좀 낫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 재에 도착하고 보니 나는 밤나무등으로 올라와 향로봉과 삼지봉 중간쯤 어디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향로봉을 갔다가 다시 이곳을 거쳐 삼지봉으로 가야 한다니 대략 난감이다. 족히 2km 이상은 더 걸어야 할 판이다. 나와의 약속도 약속이고 내연산에서 제일 높은 봉은 가봐야 하겠기에 지친 다리를 끌고 향로봉으로 향했다. 다행히 능선길이라 심한 오르막도 없고 완만한 길이라 별 무리 없이 오를 수 있었다.
향로봉 정상에 도착하니 시간은 어느덧 오후 2시, 정상에서 늦은 점심으로 삼각김밥 한 개를 허겁지겁 먹고는 서둘러 하산길에 올랐다. 향로봉에서 삼지봉으로 가는 능선길은 급하지도 오르내림도 없이 완만하다. 1시간여를 걸으니 삼지봉 표석이 나온다.
12 폭포를 지나 향로봉에 힘겹게 오르고 또 향로봉에서 삼지봉까지 오는 길에서 만난 산은 과연 같은 산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면을 보여준다. 계곡에 펼쳐진 푸른 청석과 그 위를 흐르는 맑은 물은 설악산 계곡과 비견되리 만치 화려한 풍광을 보여주었다면, 향로봉에서 삼지봉으로 오는 길은 너무나 수더분한 모습이 마치 동네 뒷산을 걷는 착각을 불러온다. 이렇게 부드럽고 풍성한 살점을 가진 산의 속에 이리도 강한 심지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사람만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산도 그와 같다 싶다. 대자연 앞에서 교만의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삼지봉에서 문수봉까지는 산길이라 해도 되고 임도라 해도 될 길이다. 아무 생각 없이 길 따라 걷다 보니 문수봉을 우회하는 길로 와버린 모양이다. 길 옆에 문수봉으로 가는 길을 알리는 이정표가 넘어져 있다. 다시 문수봉으로 돌아 올라가기엔 20km 이상 걸어온 내겐 너무 무리인 듯싶고, 수통에 물도 바닥난 상황이라 문수봉은 포기하고 문수암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했다.
문수암에서 수통에 물을 채울 생각이었으나 산길에 고즈넉이 서 있는 문수암 산문을 보니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는다. 혹여라도 나그네 발길이 용맹정진 중인 수행자의 마음을 흩트리는 것이 아닐까 싶어 발길을 돌렸다. 한참을 내려가니 계곡 물소리가 들려온다. 상생폭포가 저만치 내려다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번 산행도 무사히 끝나가는 모양이다.
오전 9시 40분경에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23.5km를 걸어 주차장에 다시 돌아온 시간은 오후 4시 50분경. 나의 이번 100대 명산 포항 내연산 산행도 무사히 끝마쳤다. 이제 열무김치 담아 놓고 미운 사위 놈 기다리고 계시는 장모님께 가야 한다. 딸이 보고 싶어지면 이렇게 사위 놈이라도 보려 하는 장모님의 마음을 알기에 아무 소리 없이 나는 간다. 얼마나 지나면 처가에 가는 길이 아프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