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향해 쓴 글이 당신을 움직이기를.
[이어령의 말] 이어령 어록집
이어령, 세계사, 2025년 1월, 볼륨 379쪽.
이어령 선생님의 어록집이자 말 사전입니다.
선생님은 1933년에 태어나 3년前인 2022년 卒하셨네요. 수 백 권의 책을 펴내셨고, 신문사 논설위원만 12년, 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 '굴렁쇠 소년' 기획, 초대 문화부장관 등을 역임했습니다. 손에 꼽히는 지성인입니다.
돌아가시기 7년 전쯤부터 선생님 역대 숙원사업이 바로 자신의 어록집을 발간하는 거였답니다. 건강상의 이유로 미뤄져 오다, 사후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배우자인 강인숙 님을 포함 최윤, 김승희, 김민희 님들이 모인 <이어령기념사업회>에서 3년의 시간을 들여 작업해, 올해 1월에 세상에 나온 첫 어록집입니다.
편집위원이었던 김민희 님이 "한국에 어록집이 드문 건, 첫째, 자기만의 언어로 사유하는 이가 드물고, 둘째, 어록집으로 낼만큼 방대한 저작물을 남긴 작가가 많지 않은 이유가 크다" 지적하고 있는데, 이어령 선생님은 이 두 가지 제약을 뛰어넘은 분이기에 가능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수 백 권의 선생님 책에서 골라 뽑은 선생님만의 말 모음입니다. 마음, 인간, 문명, 사물, 언어, 예술, 종교, 우리, 그리고 장소 총 9개 주제로, 관련 단어들을 엮어 놓았습니다. 단어를 통해 여러 지식과 지혜가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엮여 있다는 느낌입니다.
"앎의 종류에는 세 가지가 있다. 모르고 있던 사실을 알려주는 앎,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을 교정시키는 앎,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 깨우쳐 주는 앎인데, 선생께서는 이 세 가지 앎을 모두 체득하고, 자유자재로 활용하던 지식인이자 만인의 인생교사였다"는 평가가 매우 적확한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어록집을 감상으로만 전하기엔 한계가 있어, 밑줄 그었던 구절 몇 문장 옮겨봅니다.
"내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은 비가 그치자 나타난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것이다"(13쪽).
"하늘에는 비가 내려야 아름다운 무지개가 뜬다고 했지만, 인간의 마음에는 눈물이 흘러야 영혼의 무지개가 뜬다"(32쪽)
"세상에는 세 개의 사과가 있다. 아담의 사과, 뉴턴의 사과, 빌헬름 텔의 사과다. 아담의 사과는 종교를 낳았고, 뉴턴의 사과는 과학을, 텔의 사과는 정치를 만들어 냈다"(102쪽).
저는 여기에 두 개의 사과를 더하고 싶어 집니다. 세잔의 사과는 예술을 발전시켰고, 애플의 사과는 정보혁명을 나았다고요.
"미래는 오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다"(119쪽).
"茶맛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마시느냐로 그 맛이 결정된다"(124쪽). 주당인 제 생각은, "술도 마찬가지 아닐까"로 연결됩니다.
"아인슈타인에게 죽음이란 더 이상 아름다운 모차르트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이란 대답처럼, 선생님께는 "더 이상 아름다운 한국말로 글을 쓸 수 없게 되는 것이라 대답할 것"이라는 문장에선, 천상 글쟁이로서의 삶이 읽힙니다.
"과학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며, 예술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한다. 종교는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설명한다. 종교적 현상은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영성이다".(233쪽)
"의심 많은 바보가 세상을 바꾼다"(307쪽).
"당신의 작은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335쪽).
"해답보다는 물음이 있는 곳에 새로운 삶이, 새로운 지식이 그리고 새로운 운명의 문이 여린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341쪽).
말미에는 이름 가나다順으로 19분의 '헌사'가 실려 있습니다. 생전 만남과 교류를 가지셨던 분뿐만 아니라, 단 한 번도 직접 뵙지 못했던 최인아 대표님 같으신 분들의 헌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뒤엔 친절하게도 ㄱㄴㄷ順으로 단어를 찾아보기 쉽게 색인을 여러 장 배열해 두었네요.
"이어령의 말이 많은 독자들의 밑줄로 이어지기를. 그리하여 그 밑줄이 우리 인생에도 그어지길" 바라는 선생님 본인과 정끝별 교수의 바람이 많은 독자들에게 이어지길 저도 응원합니다.
책꽂이에 꽂아두기보단, 사무실 책상 옆에 두고, 오래오래 그리고 그때그때 찾아 읽고 싶은 책입니다.
올해 65번째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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