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음의 미학

비로소 받아들이고 보이는 삶의 지혜

by 레마일

은성이에게


은성아 안녕. 일주일 사이에 삼촌이 잊은 건 아니겠지?

음악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1부터 9까지의 숫자놀이를 하는 은성이와 놀며 삼촌도 잠시나마 쉬어갈 수 있었어.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뽀로로와 핑크퐁하고도 놀자.


아직은 낯도 가리고 새로운 사람이 그저 어색하기만 할 텐데, 은성이가 마음을 열어주고 삼촌과 놀면서 조금은 친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해. 만약 은성이가 삼촌에게 다가오지 않았다면, 재미있게 놀아주는 삼촌의 모습은 못 보지 않았을까? 쉽지 않았겠지만, 본인이 본래 생각하는 것을 잠시 내려놓으니 새로운 것이 보였으리라 믿어.

네 어머니와 친구로 지낸 지 벌써 13년이 흘렀구나. 매년 많이 만나지는 못했지만, 만나면 마치 어제 놀고 헤어진 동네 친구처럼 어색하지 않고 편해. 같은 나이임에도 늘 내가 네 어머니에게 배울 점을 찾고 반성할 때가 많네. 삼촌은 13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냥 열정적으로 앞으로만 나아가며 크게 이룬 것은 없어 보이는 반 면, 나와는 다르게 네 어머니는 학업과 직업적으로 멋진 도전을 했었고, 천사 같은 네 아버지를 만나 너무 이쁜 은성이와 함께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 신기해. 은성이를 키우면서 지속적인 도전을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면, 정말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다시금 깨닫게 돼.


큰 고민이 있거나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 아니면 정말 급 생각이 나서 연락이 닿으면 늘 네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아와서 근황을 공유하고 조언을 받았으면 좋겠어. 삼촌이 정말 수다스럽기에 때론 네 부모님을 지치게 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럼에도 마음 편히 이렇게 이야기를 터놓을 벗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살고 있어.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삼촌은 사회와 삶에서 쥐고 있던 그 모든 것을 잠시나마 내려놓으며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도 하는 듯해. 물론, 늘 내려놓지 못하기에 아직도 인생의 큰 숙제같이 느껴지는구나.


인생과 사회에서 참으로 신기한 사실이 있는데, 절대 놓치지 않기 위해서 힘을 쓰면 쓸수록 오히려 멀어지는 경우를 경험할 때가 있어. 오히려 힘을 빼고 물 흐르듯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이면 길이 보이거나 생기기도 하더라고. 사회에 나와 지내보다 보면 경험을 하게 되고 어느덧 은성이도 공감하는 날이 있겠지?

가을의 풍경처럼 내려놓은 순간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일 때가 있어.

20대의 반 이상을 한 분야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부서 경험을 하며 그 분야의 준 전문가로서 발돋움하려는 와중 건강의 적신호가 켜졌고, 삼촌은 계획하던 모든 일에서 내려와야 했어. 젊은 나이에 인정할 수 없기에 꼭 쥐고 있던 내 열정과 경험을 바탕으로 어떻게든 이 분야에서 성공할 거란 고집을 피우기도 했지. 오히려 그럴수록 환경에 적응을 하지 못해 이직, 병가, 그리고사가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것 같아. 그렇게 다시 망가진 내 몸과 모든 것에 지쳐있는 내 모습을 마주하니 그제야 쥐고 있던 모든 걸 내려놓았어.


솔직히 처음에는 너무나 두려웠어. 인맥도 기회도 많았던 분야이기도 했고, 서른 중반이 되어서 내가 할 줄 알는 것은 한 분야에 국한된다는 사실에 앞이 그저 깜깜하기만 하더라. 그런데 모든 걸 내려놓고, 주어진 상황에서 그저 묵묵히 시도해 보니 오히려 작은 빛이 들어왔단다. 그렇게 새로운 분야에 도전을 시작했고, 이전과는 다르게 마음 편하게 사회에서 일을 하며 지내고 있어. 원하던 원치 않던 내려놓고 난 후 삼촌의 모습은 확실히 달라졌는지 한동안 지인들과 친구들을 통해 얼굴이 편해 보인다는 말을 들었던 거 같아.


학업과 직장 관련하여 은성이 네 어머니도 정말 많은 고민과 도전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했던 걸로 기억해. 어쩌면 결혼을 하고 은성이를 낳고, 사회생활을 이어가는 네 어머니가 내려놓음을 삼촌보다 더 잘 이해하고 설명해 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어. 확실한 건 은성아, 지금은 아니겠지만, 나중에 커가면서 분명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단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 쥐고 있던 주먹을 펴고 인생과 사회에서 내려놓는 걸 숱하게 경험해 네 어머니, 네 아버지, 그리고 삼촌이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구나.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뭘 하던 삼촌은 응원하고, 내려놓은 순간이 찾아온다면, 언제든 삼촌을 찾아오렴.

화이팅.


2025년 11월 24일

내려놓음을 경험한 새우 삼촌이


p.s

모든 걸 내려놓는다는 걸 반대로 생각하면 모든 걸 다시금 시작할 수 있는 기회의 빛을 잡을 수 있는 순간이야.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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