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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수레 Jul 08. 2021

친구에게 모든 걸 걸어봤니

5살 딸아이가 올해들어 새로운 세계를 맞이했다. 


선생님이 주도하며 아이들의 교우관계를 원만하게 어루만져주던 어린이집과 달리 이제는 스스로 헤쳐나가야 할 유치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우리아이는 좋게 말하면 무난함의 끝을 보여주고 나쁘게 말하면 줏대가 없다. 3살부터 4살까지 2년을 꽉 채워다닌 어린이집 선생님께서도  "윤서는 친구에게 잘 맞춰줘서 인기가 많아요~"였으니 말 다했지.. 천성이 거절을 어려워하고, 또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되면 모든 걸 호의적으로 진행해나가야 한다는 기질이 있는 것도 같다. 그렇게 친구에게 맞춰줄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저런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딸아이의 앞으로가 적잖이 걱정되는데 아이 아빠는 둥글둥글한게 좋다는 개똥같은 소리를 잘 한다. 둥글둥글하게 맞춰주는 아이들이 인기도 많고 친구도 많을거라고.. 친구 많아서 뭐하게? 라고 되물으려다 말았다. 친구많은게 세상 모든걸 다 얻은거라고 착각하던 윤서엄마가 여기 있으니까. 


 나는 친구가 좋았고, 전부인 양 살았다. 한번도 쉬지않고 맞벌이를 하던 부모님덕에 나는 오빠손을 잡고 유치원에서 돌아오곤 했다. 더 이상 오빠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올 수 없는 고학년이 되고나서 나는 오로지 친구로 부터, 친구로 인해, 친구를 향해 움직였다. 그땐 커다란 한 무리에서 한명씩 따돌림을 시키며 몇 바퀴를 도는 왕따놀이가 유행이었다. 별다른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가장 우두머리가 되는 한두명 말고는 한번씩은 다 따돌림을 당해야 한 타임이 끝나는 못된 놀이였달까. 또래중에서도 유난히 덩치가 크고,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딱히 내세울 것 없던 내가 유독 그 차례가 자주 돌아오는 건 당연했다. 차라리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그 무리 근처에서 맴돌때 만족을 느꼈던 내가 기억난다. 투명인간 취급을 당할 때는 아직 덜 완성된 내 자아가 더 산산조각 나는 것 같았으니. 


 내가 그런 시간을 보내는 동안 부모님은 차곡차곡 티끌을 모아 작은 집 한채를 살만큼의 태산을 마련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를 왔고 동시에 랜덤으로 배정받은 중학교 덕분에 그 편협한 동네에서 벗어난 것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중학교에는 좋은 친구들이 많았다. 나만큼이나 키가 큰 여자친구들도 많았고, 내가 올드팝을 듣거나 이소라의 발라드를 들어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친구들이 없었다. 집에서 아빠의 깐깐함에 주눅들고, 항상 외로움을 타던 내 성격을 들키기 싫어 나는 학교에서 더욱 소리 높여 말했다. 남의 도시락 반찬에 관심없었지만 여기저기 책상을 옮겨다니며 친구들의 반찬을 얻어먹기도 했다. 그런 나의 꾸며진 쾌활함을 좋아해주는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그때 생각했다. 나에게 모자란 것들을 친구들이 채워줄 수 있겠구나 하고 말이다. 


 중학교를 졸업하며 나는 조금 더 친구에게 연연하는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부모님의 불화가 더 심해지고 세살터울의 오빠는 아주 먼 지역의 대학교에 입학해버렸으니 나는 말그대로 외딴섬이 따로 없었다. 불행도 행복도 나눌 사람이 없었다. 오로지 친구 뿐이었다. 그 어린 마음에 내 모든 걸 나눌 사람은 친구 뿐이라고 굳게 믿곤 했다. 


 고등학교 생활은 정말 즐거웠다. 내가 꿈꿔오던, 나를 채워줄 친구들이 가득한 세상이 현실로 펼쳐졌다. 여학생 뿐이던 다정다감하고 아기자기한 교실은 내 허전한 마음을 채워주고, 일찍 와서 늦게 까지 학교에 남아 이 모든 것을 공유하는 생활이 좋았다. 비록 밤늦게 들어간 집에서 내 나이에 버거운 가정불화를 겪으며 또 다시 나에게 닥친 현실을 마주했지만 다음날 학교로 등교하면 그 뿐이었다. 


 고등학교까지 열심히 달려오며 사귀었던 여러 친구들은 슬프게도 대학생활을 시작하면서 점점 소원해졌다.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내가 최선을 다 하면 이 관계는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기에 매순간 최선을 다 했다. 주말마다 고향에 내려가 친구들과 약속을 잡고, 중간지점에서 만나길 반복했다. 친구들 생일엔 정성어린 인사를 잊지않았고 친구가 나를 원한다면 당장 기차표를 끊어 그에게 가곤 했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내 인생에 개입했다. 하교 후 뿔뿔이 흩어지는 그런 가볍고 아이 같은 사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내가 지내온 힘겨웠던 일들을 공유하고 또 함께 위로받고,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의논 할 수 있는 깊은 사이가 바로 친구라는 생각을 했다. 다만 그 친구들과 나의 차이점은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되면 모두 다 부모님 품으로 돌아가버리는 친구들과 달리 나는 갈곳이 없었다. 그런 모습을 애써 외면하며 나는 주인아주머니와 나만 남은 하숙집에서 얼른 방학이 끝나길 기다리곤 했다. 


 대학을 다니던 중 하루는 , 명절을 앞두고 있어서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표가 모두 매진이었다. 고속버스를 타려고 이리저리 알아보던 중에 근처에서 가까운 대학에 다니고 있던 내 고등학교 친구 지현이가 전화를 걸어왔다. 지현이와 언니가 고향에 내려오기 힘들까봐 아버지가 태우러 오셨으니 같이 타고 가지 않겠냐고. 나는 그런 호의를 나에게 보였단 사실자체에 감동받아 학교앞 제과점에서 지현이네 가족에게 선물할 쿠키를 사고, 짐을 최대한 간소하게 챙겨 학교앞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얼마 후 풀이 죽은 지현이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아까의 제안은 혼자 독단적으로 생각 한 일이었고, 아버지는 그쪽으로 돌아가면서까지 가족아닌 나를 태우는 것을 탐탁치 않아해서 이미 출발해버렸다는 이야기 였다. 


 난 그런일에 익숙했다. 모두 다 가족이 있고 형제가 있었다. 아니 나도 가족이 있고 형제가 있다. 하지만 모두 다 시간을 나누고 일상을 나눌 가족이 있고 형제가 있었다. 모든 일을 재쳐두고 친구와의 약속이 최우선, 친구에게 줄 선물은 아낌없이, 친구를 도울일은 무조건 참석하던 건 나뿐이었다. 그래서 나와의 약속을 깨는 일도 부지기수였고 왜 친구는 나처럼 가족이 아닌 우리사이가 우선이 아닐까 하며 철없던 눈물을 흘리던 일도 종종 있었다. 다만 익숙하던 일도 굳은살이 생기기 전에 또 생채기가 나고 또 아프다면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친구에게 모든 걸 걸어 본 내가 결혼을 했다. 서른살이라는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나이에 5년을 넘게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꽤 먼 거리의 지방에서 결혼을 했지만 친구들은 가득히 식장을 채워주었다. 서른이 되서 결혼을 하는데, 회사를 그만두고 학교를 졸업한지도 한참인데 신부의 하객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은 두고두고 이야기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누가 알까? 그 이야기거리는 내가 친구에게 모든 걸 걸었던 댓가라는 것을 . 


이젠 무엇도 나눌 수 없던 나의 첫번째 가족이 아닌 모든 것을 나누고 있는 두번째 가족이 있다. 만날 친구가 없어도 밥투정 하지 않고 항상 나와 밥을 먹어 줄 남편친구,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자잘하게 풀어놔도 "엄마 그랬어?" 하며 대답해 줄 윤서친구. 누군가 나에게 어떤 것에 모든 것을 걸어본 적이 있냐 묻는다면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다. "친구에게 모든 걸 걸어보았노라고" 그 댓가는 씁쓸하고도 달콤했고, 또 손가락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 처럼 부질없어보이기도 했지만 또 내 인생을 지탱해 준 작은 조각들의 모음이라고. 


 오늘은 윤서에게 말해주어야 겠다. 

"윤서야, 친구에게 모든 걸 걸지 않아도 돼~ 엄마, 아빠가 여기 있잖아"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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