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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수레 Jul 08. 2021

어쨌든 난 자식이잖아.

남편과 나는 복잡한 걸 싫어한다. 비교도 그리 즐기지 않고, 세세하게 파고 드는 걸 힘들어 한다. 그런 점도 궁합이라면 이런 천생연분이 없다. 그래서 결혼도 간소하게 치뤘다. 


예식장은 모두 다 피한다는 윤달에 대부분이 포함된 패키지로 한번에 결정해버리고, 신혼여행은 자주 가던 여행지를 조금 더 길게 가기로 했다. 신혼집은 하루 날잡아 보면서 하루만에 계약했고 가전과 가구도 하나의 매장에서 모두 다 함께 구입했다. 


주례는 친한 친구 중 말 잘하는 녀석에게 맡겼고 양가 아버님들이 짧은 축사를 했다. 시집은 여동생이 먼저 결혼을 했으니 개혼이 아니었고 우리집은 내가 둘째였지만 결혼계획이 없던 오빠덕에 첫번째 큰 행사였다. 주목받을 일 없이 살던 아빠에게 내 결혼식은 몇 안되는 큰 일이었다. 친지들을 모시고 첫 집안 행사를 치르는 뿐만 아니라 아빠가 앞장서서 축사까지 하게 되었으니 아빠는 한 껏 고무되어 있었다. 


결혼식은 성공적이었다. 대단한 돈을 들인것도 아니고 오랜 시간 준비를 한 것도 아니었지만 예식은 매끄러웠고 과정은 순조로웠다. 다만 지금 생각하니 마음에 걸리는 걸 고르라면 매 순간 어쩔 줄 몰라하던 엄마의 상기된 얼굴이었다. 


엄마는 내가 스물세살에 아빠와 이혼 한 후 나와 약 6년을 왕래없이 지냈다. 물론 내가 원한 일이었다. 집을 떠난 건 엄마였고, 그럼 자동으로 유책배우자가 엄마라고 생각했기에 우릴 버리고 간 엄마와는 더 이상 연을 이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틀린 생각이라고 날 비난하고 싶진 않다. 그 당시 그 나이에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기방어였다. 


내 결혼이 정해지고 엄마를 6년만에 만났다. 상견례에는 나오지 못했고 결혼식엔 참석하기로 했다. 사돈을 결혼식장에서 처음 만나게 된 우리엄마가 얼마나 어색하고 조마조마했을지 지금에서야 알겠다. 그 당시엔 온통 내 위주, 내 생각으로 가득찼으니 엄마의 입장 같은건 안중에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조금 잔인하게 말하자면 엄마를 내 결혼식에 참석하라고 허락해 준 내 자신을 조금 칭찬했던 것도 같다. 


우리 시어머니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유난히 젊고 예뻤다. 우리엄마는 6년 전에도 그랬듯 조금만 더워도 얼굴에 땀을 비오듯 흘렸다. 그 자리 자체가 경사스럽고 기뻤겠지만 민망하고 당황스러운 건 사실이었으니 사진마다 엄마의 얼굴은 가을산에 단풍이 든듯 울긋불긋 했다. 잠깐씩 보이는 눈빛은 눈물이 고인듯도 하고 말이다. 결혼식 사진은 몇안되는 엄마의 흔적이 남은 귀한 사진이지만 나는 그 사진들을 볼때마다 슬퍼져 지금도 결혼사진을 잘 보지 않는다. 


결혼식을 잘 마쳤지만 그뒤로도 한참 자잘한 일들이 나를 괴롭혔다. 아니 더 분명히 말하자면 속좁은 아빠의 어깃장이 나를 너무도 괴롭게 했다. 신혼여행지에 도착해서 전화를 하지 않고 문자로 도착을 알린 것, 시댁에서 친정쪽으로 잘못 낸 거금의 축의금에 대해 다급하게 물어본 것, 폐백을 받을 때 우리 시집 친적들이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고 느껴진 것.. 이 모든 것들이 아빠에겐 첫 기념비적인 집안행사에서 아빠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고 한다. 그 중심엔 쉽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아빠의 자식인 내가 있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결혼식이 끝나고 한달간 나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이런일은 종종 있었다. 윤서의 첫 생일날, 식구도 많지 않고 행사도 좋아하지 않는 우리라 가족끼리 간소하게 돌잔치를 치루려 준비했다. 사돈앞에서 이혼한 부부가 함께 모이는 것이 남부끄럽다는 아빠의 말도 안되는 태클이 간간히 들어오긴 했지만 당연히 윤서를 함께 키워주느라 고생한 엄마도 참석하기로 했다. 하지만 돌잔치 당일 아빠는 나타나지 않았다. 감기에 심하게 걸렸다고 전달받은 나는 정말 그런 줄만 알고 돌잔치가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전화를 걸었는데 돌아오는 건 '신경쓰지 말고 니 할일이나 해라' 라는 아빠의 쌀쌀맞은 대답뿐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차에서 내리는 엄마의 표정이 왜 금방이라도 울것만 같았는지.. 내가 앞장서서 엄마를 참석하지 않게라도 해주었으면 하고 아빠는 바랬던 것 같다. 사돈앞에서 이혼한 친정부모가 함께 모습을 나타내는 건 우리 아빠 기준에 정말 쪽팔리는 일이니까. 그리고 우리 엄마는 이 모든 걸 알고도 그러려니 해야했겠지. 


이혼한 부부가 한자리에 모습을 보이는 건 쪽팔리는 일이라고 단언하던 아빠는 그로부터 2년 뒤 이제 그럴 걱정없이 돌아가신 엄마의 상주가 되었다.  어린 윤서를 시부모님께 맡기고 엄마 장례식장에서 자리를 지키던 나에게 "윤서가 외할머니에게 인사왔다" 라는 말이 들려왔다. 어머님이 나를 생각해서 엄마에게 윤서를 보여주러 오신거다. 아무것도 모르던 두살의 윤서는 외할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어머님께 감사하고 우리 윤서에게 고맙고 엄마에게 미안했다. 아이를 키워주느라 고생한 공을 이렇게밖에 못돌려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도 아빠는 "사돈보기 부끄럽다" 라는 명언을 남겼다. 갈라선 부부가 서로의 상주를 하고 있다는 게 부끄럽단 말이다. 나는 너무 화가나서 처음으로 그런 아빠의 말에 반기를 들며 장례식장에서 소리를 질렀다. 부끄러운 일이 도대체 무엇이며, 왜 엄마는 죽기까지 했는데 아빠한테 그런 얘길 들어야 하냐고. 그날 그 일로 아빠는 이틀간 나와 대화하지 않았다. 


모두 지난 일이지만 나는 항상 아빠의 행동에 의문을 품는다. "아빠, 어쨌든 자식이잖아, 부모는 자식을 원해서 낳았는데, 왜 자식에게 자신들이 만든 의무를 다 하길 바라는거야" 라고 말이다. 아빠는 항상 나에게 진심어린 효심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경을 바란다. 차라리 용돈을 달라고 하면 빚을내서라도 드리고 뭘 갖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든 마련해서 보내고 말텐데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바라고 또 바란다. 


진심을 받아봐야 진심을 주는 법을 알텐데 , 내가 기억 할 수 있는 가장 먼곳의 기억을 더듬어봐도 나는 그런 기억이 없다. 어쨌든 나도 내리사랑을 받는다는 자식인데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범위내에선 적어도 나는 사랑을 요구 받은 기억밖에 없다. 단조로운 주장이지만 자식은 어쨌든 자식이다. 내가 넘치는 사랑을 주었을지언정 그만큼의 사랑을 자식에게 다시 요구할 이유는 없다. 부모와 자식간의 인연을 맺는 과정에서 선택권은 오직 부모에게만 있었으리라. 그렇다면 자식에게 무엇이든 티끌만큼도 요구 할 이유는 없는것이란 말이다. 


우리 아빠는 그 사실을 아주 미리부터 망각한 듯 하다.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자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가정을 꾸렸을텐데 , 지금 매순간 공치사하며 그 댓가를 모두 자식에게 정신적인 존경으로 되받고자 한다. 자식을 낳기전엔 그럴 수도 있다 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도 자식을 낳고보니 더 이해할 수 없는 모순으로 다가온다. 자식에게 무엇인가를 되돌려 받고자 하는 순간부터 자식을 낳은 의미가 퇴색된다. 그럴때마다 외치라고 하고 싶다.  "어쨌든 난 부모잖아, 어쨌든 주기만 해야하는 존재야"라고.. 


그리고 나도 끊임없이 요구하는 아빠에게 외치고 싶다. " 아빠, 나도 어쨌든 자식이잖아, 나이를 먹어도, 아빠에게 받은게 많아도 난 죽을때까지 자식이잖아"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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