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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수레 Aug 18. 2021

엄마의 수첩

요즘의 윤서는 받침이 없는 글씨뿐이지만 스스로 읽고 쓰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중이다. 학교 가기 전에만 한글을 떼면 된다고 속으로만 생각했는데 그래도 걱정 많은 내가 염려할까 다섯 살부터 스스로 조금씩 한글을 깨치며 효도하고 있다고 할까나. 


오늘도 공부상에 앉아 색연필로 더듬더듬 글씨를 써 내려가는 윤서를 보며 장롱 어딘가 깊숙한 곳에 있을 엄마의 수첩을 떠올린다. 


엄마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너무 깊은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나기도 했지만 그보다 자식의 미래에는 안중에도 없던 무심한 인간들을 부모로 둔 탓에 학교 문턱엔 가보지도 못했다. 그런 엄마가 하필이면 조금도 나을 것 없는 남편을 만났으니. 그 자식들은 가정 조사서에 항상 부, 모 모두 초졸이라는 거짓말을 쓰면서도 거짓말을 쓴다는 죄책감, 그것도 초졸이라는 것에 대한 겸연쩍음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아버지는 야학을 다녔다. 국민학교를 나온 큰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야학에 다니며 한글과 숫자를 익혔고 그 덕에 흔히 말하는 기름밥을 먹는 기술자로 20대를 시작할 수 있었다. 엄마는 그런 기회조차 없었기에 한글도 숫자도 모르는 채로 아버지와 결혼을 하고 우리를 낳았다. 학교에서 받아오는 가정통신문도, 우리들의 숙제도, 없는 살림에 쪼개 쓰며 기록하는 가계부도 모두 아버지의 몫이었으니 거기에서 오는 고단함도 지금에서야 조금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배우기 싫어 배우지 않은 엄마가 아니었는데 항상 배우지 못한 것에서 오는 부채감을 안고 살았던 엄마가 한글을 배우는 윤서 앞에서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른다. 


어렴풋이 기억해보자면 25년도 더 된 일이다. 나는 이제 막 4학년이 되었고 오빠는 6학년을 올라가면서 동네에 작은 속셈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도 입시학원은 있었지만 동네 작은 속셈학원의 수강료가 훨씬 저렴했기에 우리 부모님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30대 후반의 여자 원장님은 작은 상가 1층을 얻어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고학년의 전과목을 봐주며 동네에서 으뜸가는 아이들의 사랑방이자 다복한 공부방을 알차게 운영했다. 


아버지가 보기에 원장님이 오빠를 살뜰하게 가르치기도 했고, 종종 학원비를 내러 가는 길에 마주쳤던 인상이 퍽이나 믿음직스러웠었나 보다.  지금 생각하면 뜨악할 일이지만 하루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엄마손을 붙잡고 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원장님을 만나러 갔다. 나중에 오빠에게 들은 이야기였지만 원장님을 붙잡고 짧고도 긴 두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하며 결론은 " 우리 땡땡이 엄마 한글을 좀 가르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라는 읍소를 했다고 한다. 


얼마나 당황스럽고 황당했을까. 그때의 원장님이 지금의 내 나이쯤 되었을 텐데. 가르치는 학생의 부모가 찾아와 우리가 어려운 환경에서 크느라 말 그대로 무학이다, 똑똑한 원장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 애엄마에게 글씨 좀 가르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라는 부탁을 받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닌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날부터 우리 엄마는 매주 두세 번씩 시간 나는 대로 원장님과 약속을 정하며 한글을 배우러 다녔다. 부처님보다 더 자비롭고 하느님보다 더 지혜로우신 원장님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던 우리 엄마에게 한글도 숫자도, 남는 시간엔 덧셈 뺄셈도 가르쳐주셨다. 물론 후에 엄마가 우울증과 알콜릭으로 공부엔 손을 놓아 도로아미타불이 되긴 했지만. 


그 당시엔 엄마가 작은 학원 책상에 원장님과 마주 앉아 공부를 하는 모습이 너무도 생경하고 쑥스러웠다. 이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지 하는 어린 마음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는 분명히 행복했다. 공부하던 엄마의 얼굴이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그때의 엄마는 항상 만져보지 않아도 부들부들한 복숭아처럼 발그레한 미소를 머금곤 했다. 


우리가 다른 동네로 이사 가면서 엄마의 짧지만 강렬했던 첫 학업은 그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처음이 어렵지, 배움을 시작하면서 맛본 희열은 생각보다 컸나 보다. 엄마는 다니던 공장에서 가까운 야학을 찾아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엄마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 배우지 못했다고 지금도 기회가 없다 생각하면 평생 까막눈으로 살아야 한단 생각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다. 그 당시의 엄마는 그 야학에서 배우고, 깨닫는 것 자체가 자식인 나에게 너무도 자랑스럽고 뿌듯한 경험이라 여겼다. 하루는 학교를 마친 나에게 야학을 구경 오겠냐 물어 내가 흔쾌히 들렀던 적이 있다. 민방위대피소인 지하도를 작은 교실로 꾸며 만든 상록학교라는 이름의 야학은 아담했지만 거대했고 은은했지만 선명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날의 엄마는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에 약간 긴장했는지 교실이란 풍경 속에 정물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있었지만 어느 학자보다도 똑똑하고 차분해 보였다. 


맞벌이로 회사 생활하며 아이 둘을 키우며 시간을 쪼개 야학을 다니던 엄마가 아버지와의 작은 균열로 시작한 불화가 심해지며 배움에서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기 시작했다. 야학을 드문드문 나가고, 회사를 마치면 아버지와 마주치지 않으려 술을 마시고 늦은 귀가를 일삼으며 부모님의 불화는 점점 더 큰 불길로 우리 집을 태우고 있었다. 그 불길은 우리 집을 태우고, 우리의 유년시절을 태우고 엄마의 정신을 좀먹으며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이라는 검은 재를 뱉어냈다. 검은 재라도 털겠다고 이혼을 선택한 부모님을 막을 명분이 없어 우리는 지켜보기만 했다. 


이혼을 하고도 완전히 끝낼 수 없는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인 우리는 작고 큰 부침을 겪다가 10년 만에 엄마를 떠나보냈다. 장례를 치르고, 엄마가 혼자 살던 집을 정리하고, 몇몇 가지 물건을 가지고 아이와 남편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니 비로소 엄마가 떠났다는 것이 실감 났다. 한참을 앓다가 펼쳐본 가방에서 값나가는 것 없고 조촐하던 엄마의 유품 속 작은 수첩 하나를 발견했다. 


 중요한 약속이었는지 몇 월 며칠 몇 시가 적힌 쪽도 있고, 오래된 노래 가사가 적힌 것도 여러 장이다. 누군지 모를 이에게 신세한탄을 한 편지인지 아님 그것조차도 노래 가사인지 모를 서글픈 이야기도 적혀있다. 짧은 세월이었지만 여기저기서 동냥으로 배운 한글 덕에 나에게 남겨진 소중한 엄마의 흔적이라 고마우면서도 차마 꺼내보질  못한다. 슬프다는 말로는 한참이 부족하다. 그 수첩을 펴면  엄마가 혼자 지내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눈감는 순간까지 마치 내 눈앞에서 재생되는 느낌이라 펴볼 수가 없다.  


마지막쯤엔 오빠 이름과 생년월일, 내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혀있었던가 그랬다. 짤막한 편지도 쓰여 있었던 것 같고. 떠날 줄 모르고 언제나처럼 혼자 우두커니 그 방에 앉아있다가 마시고 싶은 술을 조금 먹고 나니 우리 생각이 나서 애써서 써놓은 거겠지 내 마음대로 추측해본다. 


엄마가 세상에 남기고 간 건 종이 몇 장에 끄적인 사소한 이야기와 배 아파 낳은 자식 둘뿐인데. 그 종이들은 유약한 딸 때문에 깊숙한 장롱 속에서 나올 줄 모르고 둘밖에 없는 자식들은 서로 사는 게 바빠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하며 살고 있다. 


아이의 한글 깨치기를 보며 엄마를 떠올린다. 나의 분신을 보며 또 다른 나의 분신을 떠올린다. 아이가 조금 더 자라고 그만큼 나이를 더 먹은 내가 조금 더 의연해진다면 엄마의 수첩을 다시 펼쳐볼 수 있겠지. 그럴 수 있으리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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