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빈수레 Oct 12. 2021

애엄마의 추억팔이 맛집 : 구남친

 메뉴명 : 구남친

지난주, 친구와 함께 우리가 자주 가던 타르트 가게엘 갔었다. 오랜만에 먹는 단골집 타르트는 달콤했고 부드러웠다. 그 가게를 처음 가던 때의 우리는 20대였는데 지금은 서른 후반을 바라본다는 게 왠지 꿈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날 둘 다 동시에 생각한 게 있었는데 여태 말 안 하다가 오늘 아이와 공부상에 앉아 색칠놀이를 하는데 친구에게 카톡이 왔다. 자기 사실은 지난주 거기 갔을 때 그 오빠 생각났었다고.. 그래서 사실은 나도 그랬다고 답해줬다. 내 구남친인데 왜 네가 떠올렸냐고 우스갯소리 하다가 내가 그 동네에 간 것도 너무 오랜만고 의식적으로 그 동네는 피했었구나 깨닫기도 했다. 바로 구남친이 살던 그 동네!


지금 같으면 겁이 나서 못할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던 때가 그때였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스물다섯에 서른다섯을 만나 스물여덟 살까지 서른여덟 살의 남자를 사귀었다. 고로 나는 85년생인데 75년생을 3년이나, 그것도 내 기준에서 가장 활기차고 예쁜 나이에 다른 남자에게 한 번도 한눈조차 팔지 않고 최선을 다 했다는 말씀!


만나게 된 경위는 뭔가 오그라들어서 딱히 기억하고 싶지 않다. 아무튼 만나는 동안 재미있었으니 첫 만남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나는 생각보다 겁 없고 당돌한 애였다. 그땐 연남동에 살면서 종로에 있는 회사를 다녔었는데 오빠는 경기도에 살고 경기도에 있는 회사를 다녀서 주말마다 날 만나러 서울로 올라왔었다. 그때의 나는 서울과 경기권의 거리가 우리 사랑을 방해할 만큼 멀다고 생각 못했었기 때문에 오빠에게 왜 평일엔 못 오냐고 염병을 떨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차 오래 타는 걸 못 견뎌하는 나는 돈 받고도 못 할 짓이었다.


가끔 회사가 늦게 끝나고, 주말에 사정이 있어서 못 만나게 되면 오빠가 일찍 퇴근하고 강남까지 오는 게 일상이었다.. 강남 한복판에서 평일 저녁에 데이트를 하고 있노라면 뭔가 내 자신이 일도 사랑도 대단히 잘하고 있는 커리어우먼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아무튼 그렇게 2년을 사귀다 보니 알고 싶지 않은 것들까지 알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한국사람 종특인 건지 뭔지.. 사랑한 시간과 가정사를 알게 되는 정도는 비례한다는 슬픈 흐름.. 우리 집은 아는 사람은 다 알다시피 오래된 가정불화로 이혼한 가정이고 오빠네는 내가 감당하기에 생각보다 어마어마했다. 정정하자면 그때의 나 말고 지금의 나이 든 내가 생각하기에 말이다.


우리 아빠가 58년 개띠에 이제야 환갑을 지났는데 그 당시 오빠네 부모님 두 분 다 칠순을 넘긴 연세였다. 그 당시 양가 부모님이 20살은 차이가 났다는 뜻이다. 거기다 시집 장가를 안 간 마흔이 넘은 누나와 형이 한 명씩 있다고 했다. 심지어 누나는 독립하지 않고 함께 살면서 종종 카드값이 모자라 부모님께 손을 벌린다고 했다. 부모님은 작은 건물이 있어서 세를 받으며 가계를 꾸려나가는데 왠지 온 가족이 그걸 믿고 있는 듯했다.


그 와중에 집안 대소사를 관여하며 가계를 꾸릴 젊은(?) 사람이 오빠뿐이라서 그런 생활을 하다 보니 결혼할 생각도 여유도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실제로 날 만나면서 처음 한 얘기가 본인의 비혼 주의에 대해 알리고 연애를 시작하기도 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2010년도에 아주 드물었던 비혼 주의를 가진 남자라니. 지금 생각하니 이모저모 신기한 연애를 했구나 나의 20대 여..


아무튼 그런 와중에 나를 만나면서 결혼이란 걸 해봐도 좋겠다 라는 생각이 생겼단다. 지금 들었다면 열 살 어린 여자 꼬시려고 듣기만 좋은 말을 하는구나 했을 텐데. 그땐 그게 듣기도 좋았지만 마음에도 드는 말이었다. 그래서 진짜 결혼해버릴까 하는 와중에 내가 아파서 갑자기 수술을 하게 되었고 그 당시 내 보호자였던 아버지와 병문안 왔던 열 살 많은 딸의 남자 친구가 갑자기 만나게 되는 나만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내가 하는 일에 한 번도 반대를 하지 않던 아버지가 남자 친구의 얼굴을 한번 보고는 안된다고, 차라리 혼자 살라고 했다. 친구들이 아무리 나이 차이로 미주알고주알 훈수를 둬도 안물 안궁이었는데 아버지의 말은 뭔가 흘려버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아주 예전부터 해온 결심 하나가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은 하지 말자 였기에 그때부터 미친 듯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런 높은 파도들을 무시하고 3년 넘게 꾸역꾸역 만났다. 심지어 오빠는 신혼집으로 살 아파트까지 알아보는 중이었고 해가 바뀌면서 3주년 기념으로 꽤 굵은 커플링도 하나씩 나눠 끼고 다녔다.


그때는 어쩐지 내 눈에 보이는 게 모두 다 총천연색인 느낌이었다. 연남동, 홍대 일대를 쓸고 다니며 데이트하고 한강에 앉아 우리 미래를 이야기하던 내 자신이 요즘 말로 어찌나 힙해 보이 던 지 , 그 순간에 오빠와 함께인 게 신나기도 하고 마치 우리 둘이 함께라면 평생을 이렇게 힙하게 같이 보낼 수 있을 거란 치명적인 착각에 빠져 살았다.


거기다 내가 서울에 살던 동안은 유난히 집주인 운이 없어서 이사를 꽤 자주 다녔다. 그 고단한 이사길에 부모님도 한번 못 와봤는데 오빠가 항상 함께 했다. 그래서 아주 나중에 내가 결혼을 하고 자취방에서 신혼집으로 , 신혼집에서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하는 순간에도 잠시 잠깐 그 사람 생각이 났다. 다른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이 번거롭고 힘든 순간에 항상 나 대신해주다시피 했던 그 당시에 그 사람의 인간적인 정성이 고마워서.


연애 3년이 넘어가면서 뭔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내 나이는 결혼에 바쁜 나이는 아니었는데 오빠 본인은 결혼에 대한 중대사를 결정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서 본인이 분양받을 아파트 위치에 대해 나에게 의견을 구하기도 하고 본인의 가정사를 조금씩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런데 내 마음이 변한 걸까 아니면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흔히 말하는 모르는 걸 알게 되서일까, 그 모든 이야기들이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난 사실 부모님이 이혼하고 한동안만 슬펐지 그 후엔 괜찮았다. 15년 가까이 치열하게 싸우던 모습을 이제 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나만 잘하면 된다는 홀가분함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오빠와 결혼을 하게 되면 다시 집안, 가족이라는 단어로 묶인 사람들 때문에 부담감을 가져야 한다는 게 미치게 두렵기 시작했다. 아마 오빠도 알았겠지.. 그러니 속도를 늦추고 결국은 헤어졌겠지. 여차여차 사람 마음이 식는 건 순식간이다.


일주일 시간을 갖고 3년 6개월 차에 자주 가던 카페에서 다시 만났는데 어렴풋이 나는 기억을 더듬자면 그 카페에서 많이도 울었다. 헤어지기 싫어서 울고 안 헤어지면 나에게 닥칠 상황이 무서워서 울었다. 둘만 오래오래 잘 살 수 없는 걸까 생각하다가 얼마 전 데이트 중에 오빠가 부모님의 건강보험에 대해 이리저리 검색하는 걸 한참 기다렸던 기억이 났다. 아마도 결혼하면 그것보다 더 많고 복잡한 일들이 사막에 모래알 수준으로 차고 넘치겠지. 그래서 아마도 이번 생에는 이 사람과는 별 인연이 없나 보다, 그만 울고 일어나자 라고 순식간에 결심했다.


딱 한장 남은 사진 : 많이도 울었던 홍대 그 카페


순순히 받아들인 오빠가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걸 만류하고 홍대입구역에서 나란히 지하철을 기다렸다. 끼고 있던 커플링의 이물감이 점점 커진다는 생각은 걷는 내내 했었기 때문에 일찍이 빼고선 손에 쥐고 있었다. 그러다 지하철이 오는 게 보이길래 반지를 오빠의 자켓 주머니에 흘려 넣었다. 나만 울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보다 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가져가"라고 말하는 오빠의 얼굴이 보였다. 아마도 그 오빠가 우는 모습을 본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오빠가 자켓 주머니에 넣어준 반지를 다시 꺼내서 내밀었는데 나도 너무 우느라 시야가 흐려져 딱히 받을 정신도, 그럴 생각도 없이 지하철을 탔다. 문이 닫히고 출발하는 순간이 길고도 짧게 느껴져서 오롯이 나를 쳐다보다 울다 하는 그 사람 얼굴을 한참 바라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날 집에 와서 밤까지 울고는 그다음 날부턴 잘 지냈던 것 같다. 아마도 울어봐야 별 소용없다는 걸 알았던 것 같다.


물론 짧은 시간 만난 게 아니라서 정리할 것들이 꽤 많았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어마어마한 연결고리가 아니었어서 오히려 그런 쪽으론 정리하기가 편했다. 의외로 여기저기 데이트하고 여행하며 받은 자잘한 선물이나 편지들이 헤어지고도 한참 동안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시간이 갈수록 힘들었다.


되게 좋은 사람이었는데. 책임감도 있고 성실하고 예의도 있고. 다만이고 지고 가야 할게 너무 많아서인지  부담감을 쉽게 느끼고 좀 더 편하게 볼 걸 어렵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나를 만나는 것도 그 사람이 아주 어렵게 결정하고 만났기에 더 정성을 다해줬던 것 같다. 나 역시도 어려서 철이 없었다 한들 열 살 많은 남자 친구를 사귀는 데 쉬운 결정은 아니었기에 나 또한 최선을 다 했었다.


친구들과 부모님이 한참 후에도 가끔 나에게 묻곤 했다. 그 사람은 잘 있겠지? 장가갔겠지?라고. 둘 사이 연결된 인맥이 전혀 없었고 그 사람도 나도 헤어지자 마음먹으면 다시 연락하자 하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슬프게도 아주 깔끔했다. 차라리 잘된 일이지.


생각해보면 내가 여차여차 모두 다 받아들여서 결혼했다면 아마 지금 두세 명의 아이 엄마가 되어있을 수도 있고 열 살 많은 남편, 시누이, 아주버님, 시부모까지 이리저리 챙겨야 하는 막내며느리가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안 그러길 천만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렇게 되었다 해도 그 나름 만족하고 살았을 것 같기도 하고. 지금도 나쁘지 않은 남편 만나 그 상상보단 편안하게 살고 있으니 다행이다 싶다.


다만 결혼하고 살림하고 아이 낳고 딱 한 가지 억울한 게 있다면 가끔 나도 살면서 한 번쯤 꺼내보고 싶은 이런 추억이 있는데 출산 후 하나씩 영구삭제돼버린다는 것.. 어디 저장해놓은 곳도 없고 텍스트로 표현도 안 되는 오직 내 머릿속에만 있는 이런 추억들 말이다. 산후 치매라고 장난처럼 말했는데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이나 순간들이 너무도 쉽게 잊혀간다.


이건 사실이다 싶은 게 결혼 안 한 친구들은 예전 일을 너무도 잘 기억한다. 재미있던 일들, 누구의 남자 친구, 누구의 부모님, 선생님 등등.. 나도 그런 기억들 한편에 뒀다가 지칠 때 꺼내보고 웃고 싶은데 이미 저장용량은 매일 검색하는 육아 템에 밀려 만선이고.. 그 기억들은 자동 삭제되고 있는가 보다.


아이의 색칠놀이를 도와주다 창에 비친 나를 보니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머릿속 기억을 이리저리 끄집어 내봤다. 그리고 그 기억들의 귀퉁이가 또 조금씩 사라질까 봐 헛소리를 나열해보기까지 했다. 싫었던, 좋았던, 쪽팔렸단, 자랑스러웠던 기억 모두 나중에 보면 총 천연색이다. 이제 이 기억은 잘 접어놨다가 윤서가 한 열 살쯤 되고 내가 마흔이 넘으면 다시 읽어봐야겠다.


나도 그럴 때가 있었지.



작가의 이전글 엄마의 수첩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