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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수레 Oct 18. 2021

집 떠나기 전날, 엄마는 고추장을 담갔다.

우리 집에서 잘 안 팔리는 식재료, 고추장이 똑 떨어졌다. 아이가 있으니 매운 반찬은 잘하지 않고, 나조차도 다이어트 핑계로 빨간 음식은 먹지 않은지 꽤 되었다. 남편은 저녁 한 끼만 먹는 둥 마는 둥인데 그마저도 반찬을 두 번 할 수 없으니 아이 반찬을 맛있게 먹어준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에선 간장이 마를 날 없고 고추장은 항상 제자리걸음이다. 그러다 몇 번의 연휴를 지나면서 떡볶이도 해 먹고, 제육볶음도 해 먹고 흔치 않은 밥상의 연속으로 고추장이 이제야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얻어먹을 땐 몰랐던 소중하고 비싼 분들 


스무 살에 집을 떠나 서른 살에 결혼할 때까지 10년이란 시간을 자취생으로 살았지만 결혼하기 전까지 고추장이 그리 비싼 줄 몰랐다. 매운 음식을 좋아했지만 사 먹는 일이 많았고 고추장이 필요하면 집에서 한 국자 떠오면 그만이었다. 그마저도 다 소진하지 못해 다시 얻어오는 일이 거의 없었고 잘못 보관해 곰팡이가 피면 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렇게 내 자취 인생에서 홀대받던 고추장이 이리도 비싼 거였다니..! 결혼을 하고 오롯이 내가 살림을 꾸리고, 고추장 값을 내가 지불하면서 알게 된 또 하나의 사실이다. 


그것뿐만은 아니지. 자취생활을 해보지 않은 친구들은 모르는 게 다반사인데 휴지 한 장, 비누 하나, 막 짰던 치약도 다 돈 주고 사야 하는 것들이라는 걸! 아마도 몰랐을 거다. 나도 모르긴 했지만 아주 일찍 자취를 시작한 덕분에 아예 감이 없진 않았다. 다만 주방을 거의 사용하지 않던 미혼 때는 모르던 식재료값을 결혼하면서 시시콜콜하게 다 알게 되고, 왜 어른들이 음식 버리면 벌 받는다~ 했던 건지도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나와달리 음식을 사 먹을 줄 몰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와 같이 살던 아빠는 집밥을 좋아했다. 태생이 소화기가 약했고, 입맛이 까다로웠다. 집에서 해 먹는 밥은 시시각각 엄마에게 하는 잔소리 한 번이면 싱겁게, 무르게, 짜게, 덜 짜게 가 조절이 가능했지만 사 먹는 밥은 그럴 수 없으니 집밥을 선호했던 것 같다. 엄마는 밥을 맛있게 먹는 편이 아니었다. 생선은 비린내가 나서 싫다 했고 고기반찬은 질겨서 싫다고 했다. 우리가 항상 맛있게 밥을 먹고 나면 이것저것 모아서 비벼 먹는 걸 가장 맛있게 먹었다. 


지금 생각하니 생선이나 고기는 굽다 보니 그 냄새에 질려버려 맛있게 못 드신 것 같았고, 나중에야 아무 반찬에 비벼서 맛있게 먹었던 건 마음이 편해서였던 것 같다. 밥상을 차려 내놓으면 맛을 보고 짜네, 싱겁네 하는 말을 단 한 번도 빼먹지 않던 아빠와 같은 밥상에서 맛있게 밥을 먹을 턱이 없었다. 나와 오빠는 어렸고, 특히 나는 그런 마음까지 헤아리기엔 더 어렸다. 아주 나중에 윤서를 낳고 백일까지 엄마와 같이 살면서 더 정확히 알았다. 우리 엄마는 갈치구이도 잘 먹고 아웃백에서 포장 해온 스테이크도 잘 먹었다. 생각보다 나물반찬은 그리 즐기지 않았고, 제시간에 밥 먹는 걸 즐거워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학교 앞 작은 자취방에서 서울 회사 앞으로 거처를 옮기는 동시에 엄마도 아빠와 이혼 서류 정리를 하고 집을 떠나게 되었다. 재미있다고 해야 하나.. 네 명의 가족이 네 곳의 집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이다. 아빠는 우리가 모두 함께 살던 그 집에 그대로, 엄마는 집을 떠나 따로 구한 혼자만의 보금자리로, 오빠는 제대해서 다시 복학했으니 학교 기숙사로, 나는 졸업하고 취업한 서울 회사 근처 자취방으로. 시기가 야속하게도 그랬다. 우리는 분명 한 줄기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누구 하나 서로에게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엄마는 아빠의 품에서 '탈출' 하는 듯 보였고 우리는 어버버 하다 그래도 대견하게 할 일을 하러 떠나야 했다. 


마지막 미션이라도 완수하듯 엄마는 집을 나가기 전 마지막 일주일을 분주하게 보냈다. 쌓여있던 본인의 옷가지들을 정리하고 버리고 또 버렸다.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짐을 줄여야 했기에 버리고 또 버려서 엄마의 옷장은 금세 휑하니 비었다. 그리곤 나와 목욕탕을 가자고 했다. 목욕 가는 건 주말의 일과 같은 거였는데 엄마 입장에선 마지막으로 내 등이라도 밀어주고 싶었던 건지 주말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날 우리는 목욕을 갔다. 목욕탕에서 엄마가 등을 밀어줄 때도, 머리를 감을 때도 흐르는 물줄기를 무기 삼아 나는 내내 울었다. 등을 밀어주는 엄마의 손길이 마지막인 것 같아 울었고 누구와 함께 목욕을 올 일이 더는 없을 것 같아 또 울었다. 


목욕을 다녀온 다음날 엄마는 주방에 커다랗게 신문을 펴고 고추장을 담그겠다 했다. 김장할 때나 꺼내던 큰 대야를 꺼내고 끓이고 삭히고를 반복했다. 가루들을 꺼내서 풀고 저어주고.. 점심 먹고 시작한 일은 저녁이 되어서야 고추장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엄마가 길쭉한 주걱을 쥐고 아무리 저어도 쉬이 섞이지가 않아서 오빠와 내가 냉큼 주걱을 받아 부지런히 저었다. 되직한 고추장에 주걱이 지나갈 때마다 길이 생기고 또 그 길이 고추장으로 덮이고.. "이제 됐다"라는 엄마의 말에 주걱을 놓고 네 개의 작은 플라스틱 단지에 고추장을 나눠 담았다. 집에 있을 아빠는 무거워도 괜찮으니 가장 큰 단지에, 오빠와 나는 혼자 먹을 테니 더 작은 단지에, 엄마는 가방에 넣기 쉽게 네모난 통에 고추장을 퍼 담았다. 


첫 번째 통에 고추장을 담으면서부터 울기 시작한 나는 마지막 엄마 몫의 고추장을 다 담을 때까지 내내 울었다. 그리고 뚜껑을 닫으며  엄마, 안 가면 안 돼?  하고 더 크게 울었다. 엄마는 그냥 희미하게 웃으면서 "왜 울고 그래~" 하고는 말았다. 왜냐면 그리고는 또 멸치를 볶아 네 개로 나누고, 미리 담가놓았던 깻잎장아찌도 나눠 담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 길로 집을 나가 6년간 나와 왕래하지 않았다. 물론 나의 뜻이었다. 고추장에 밑반찬까지 해놓고 간 엄마가 야속했고 어쩌면 우릴 버렸다고 느꼈기에 스물세 살의 나는 엄마와의 관계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긴 시간을 살았다. 서른 살에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서른세 살에 윤서를 낳지 않았다면 엄마가 생선과 고기를 좋아하는 것도, 엄마는 사 먹는 밥을 좋아한다는 것도 몰랐을지 모른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내 손 닿는 곳에 살기 시작하면서 나는 다시 엄마의 고추장을 얻어오기 시작했다. 엄마가 살던 주공아파트 1층은 고맙게도 볕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했다. 겨울의 추위는 매서웠지만 여름은 쾌적했고 오롯이 엄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엔 좋은 곳이었다. 엄마는 그곳에서 살뜰하게 만든 먹거리들을 부지런히 우리 집으로 실어 날랐다. 결혼한 지 한참인데 고추장도, 참기름도, 나물반찬도 엄마 덕분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기분으로 편하게 얻어먹었다. 


조금 더 행복하고자 집을 떠났던 엄마는 집을 떠난 지 10년 만에 혼자만의 공간에서 세상을 떠났다. 더 이상 남편을 미워하지도, 자식을 걱정하지도, 손녀가 보고 싶어 발 동동 하지 않아도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말이다. 엄마가 떠난 뒤 집을 정리하는 동안 수많은 고추장과, 참기름과, 말려놓은 나물들과 나를 주겠다고 챙겨놓은 자잘한 물건들이 끝없이 나왔다. 10년 전 엄마를 보내기 전 울었던 것처럼 내가 표현할 방법은 눈물뿐이라 또 울면서 엄마의 집을 정리했다. 아깝지만 엄마가 담가놓은 것들은 씻어버리고 엄마가 입던 것들은 누구의 손이 닿는 것이 싫어 모두 폐기했다. 내가 선물한 지갑도, 가방도 모셔놓고 한번 쓰지도 않은 것들이 아까웠지만 엄마에게 보낸다 생각하고 태워버렸다. 


엄마의 제사를 두 번 지낼 동안 우리 집에 가득했던 엄마의 흔적은 야금야금 사라져 갔다. 고추장도 혹여나 썩을까 봐 부지런히 먹어버리고, 엄마가 부지런히 담가준 매실청도 아이 반찬에 열심히 넣어먹고 이젠 엄마에게 받아먹던 것들을 인터넷으로 척척 주문하는 게 익숙해질 만도 한데 그럴 때마다 마음이 시리다 고작 고추장을 보고 엄마 생각을 하다니. 


멸치를 볶고 고추장을 담가주곤 이제 더 행복해지겠노라고 떠났던 엄마는 나중에야 말했지만 단 한순간도 우리 생각에 행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윤서를 낳고 나니 엄마의 그 절절함이 너무 날카롭게 나의 마음을 그어버린다. 그때 그 당시 우리를 두고 가던 엄마가 너무 많이 힘들지 않았길..  뒤늦게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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