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빈수레 Oct 26. 2021

이사 몇 번 해봤니? (주거 안정을 찾아서)

아주 어릴 때 기억인데 꿈인지 생시인지 아직도 헷갈리는 기억이 있다. 일곱 살까지 슈퍼 옆에 딸린 셋방에서 네 가족이 살다가 처음으로 벽돌과 시멘트로 지은, 우리 집만의 현관문이 있는 다세대주택으로 이사하던 날밤. 자다 소변이 마려웠던 나는 낮에 봤던 수세식 화장실이 신기해 엄마를 깨우는 것도 잊고 혼자 스르륵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더랬다. 그리곤 변기 커버를 한번 만져보곤 소변을 보고 물 내리는 레버를 힘차게 당기는 순간 "누구야!" 하고 안방에서 달려 나오는 아빠와 엄마의 모습. 사실 생시가 확실한데 그냥 그 장면이 너무도 연극처럼 다가와 꿈인가 하고 한번 생각해봤다. 


집안으로 들어가기 전 반듯한 섬돌이 있던 그 다세대주택에서 2년을 살다가 부모님은 새로 지은 주공아파트로의 입주를 성공했다. 아이들은 커가고 마냥 방 하나 거실 하나의 좁은 집에 살 수 없었기에 알뜰함과 근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서 아끼고 또 아꼈겠지. 그리고는 두어 번 더 이사를 한 뒤 지금은 28평의 좁지도 아주 넓지도 않은 아파트에서 아빠 혼자 평화롭게 살고 계신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 정들만하면 이사를 하는지, 나는 국민학교를 세 개나 거치게 되었는지, 한 집에서 쭉 살 순 없는 건지 말이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떠나 살면서 "주거안정"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싱글, 직장인으로 살면서 이 한 몸 누일 집 찾는 건 사실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회사가 가까우면 좋고 아니면 아쉽고, 치안이 아주 나쁘지만 않으면 좋겠고, 가지고 있는 돈으로 충당되는 것을 최우선으로. 이런 몇 가지 조건을 세우며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군! 을 외치며 나는 서울에서  7년간 다섯 곳의 집을 거쳤다.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다섯 번의 이사라니.. 모순 오브 모순이지만 사실 그랬다. 바쁘고 분주했지만 어렵진 않았다. 그저 집이 괜찮으면 돈을 올려달라고 했고, 계속 살고 싶었는데 친인척이 들어와서 살게 되었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매번 1톤 트럭 용달을 수소문해서 부랴부랴 이사를 하고.. 또 월세가 부담스러울 땐 하우스메이트를 구하고. 겁도 없이 위치도, 집값도 대한민국 중심이던 서울에서 7년을 버텼다. 결국 주거 안정은 찾지 못한 채 내려왔지만 말이다. 


지나고 보니 "주거 안정"을 목표로 하는 이사의 본격 시작은 결혼이었다. 모두가 그렇겠지만 신혼집이라는 게 단순히 부부가 함께 살기 시작한 집이라는 의미를 떠나 앞으로 두 사람의 경제적 상황을 뒷받침할 종잣돈이라고도 느껴졌다. 그래서 우리도 조금이라도 더 나은 신혼집을 구하고 싶었지만 우리가 이렇게나 급하게 결혼할 줄 알았던가? 사고 싶은 것 다 사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나니 결혼식을 앞두고 남은 건 수중에 3천만 원의 보증금뿐이었다. 


 가진돈 3천으로는 원룸 전세도 구하기 힘들었기에 월세가 너무 아까웠지만 3000/35짜리 투룸 빌라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부모님의 도움은 나중에 정말 급할 때 청해보자 했던 기특한 그때의 우리를 칭찬한다. 결론적으로 나중에 집을 살 때 더 큰 도움을 받았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 집에서 아이 낳을 때까지 3년 반 을 살았다. 1년간 꼬박 천만 원에 가까운 월세를 내면서도 아이가 없어서 열심히 돈을 모을 수 있었다. 35만 원의 월세를 내지 않고도 비슷한 집을 전세로 구할 만큼의 돈을 모았을 때 집주인이 우리에게 8천만 원의 전세를 권유해왔다. 좋지! 이사비용도 아끼고.. 큰 변화 없이 2년을 더 살 수 있다니. 갑자기 아이가 생기지 않는 한 별 문제없었던 우리였기에 냉큼 그 제안을 받아들여서 우리는 8천만 원의 전셋집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게 계획대로 되면 재미없는 게 내 인생이다. 전세를 계약하고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윤서가 생겼다. 아이 갖기 힘든 몸이었고, 2년의 자연임신 시도에도 묵묵부답이었기에 약간은 포기하던 차에 긴장 풀지 말라고 우리에게 노크 해준 윤서. 그래도 괜찮았다. 아이 하나 키울 정도로는 괜찮은 집이지~ 하고 생각하고 전세기간을 채우며 생각해보자 했다. 배는 점점 불러오고 아이 낳을 날은 가까워오는데 임신 8개월째 접어들던 차에 서울로 발령을 받았다는 남편의 청천벽력 같은 소식. 눈물도 안 났다. 눈물 흘리는 건 사치였달까. 두 달도 안 남은 출산과, 당장 한 달 뒤로 다가온 남편의 서울 출근, 아직 1년 가까이 남은 전셋집까지.. 부른 배를 안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서울로 출근하기 좋다는 한 광역시에 전세 1억짜리 쓰리룸 빌라를 계약했다. 그때가 바야흐로 뱃속 윤서가 36주 차에 접어들던 때였다. 


몰딩은 갈색이지만 추억은 총 천연색이던 신혼집


윤서는 결국 신혼집에서 낳았다. 남편과 아이 100일까지 주말부부를 하며 엄마가 평일에 올라와 아이를 봐주고 내 산후조리를 도와주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 윤서는 출생 신고한 지 80일 만에 태어난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이삿날을 받아두고 엄마와 함께 지낸 신혼집은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좋은 일이 많았던 집이었다. 남편이 원하는 곳으로 이직을 하기도 했고 아이를 포기했던 우리에게 윤서가 찾아와 준 집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와 아기 윤서와 좁은 거실에서 복작거리며 100일 가까운 시간을 보냈기에 이삿날 많이도 울었다. 새로운 곳으로 가는 두려움과 익숙한 곳을 떠나는 아쉬움에. 


부모님께 도움을 받아 2천만 원을 더 보태 구한 1억짜리 전셋집은 한마디로 엉망이었다. 임신 34주에 , 밤이 늦은 시간에, 공인중개사의 차를 타고 집 앞에서 내려 정말 말 그대로 집만 보고 계약한 터라 집 앞 골목이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고 이삿날을 맞이 한 집이었다. 집 근처 서울로 가는 급행 지하철역이 있다는 것만 거짓이 아니었다. 나지막한 언덕에 모여있는 빌라촌에서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는 엉망인 쓰레기들, 술 마시고 고성방가를 일삼는 이웃들, 길거리엔 담배꽁초와 침범벅에 유모차를 끌고 지나갈 수 없는 거친 인도까지. 이사 정리를 도와주러 며칠 더 머물던 엄마의 얼굴에 심난함이 느껴졌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나까지 무너지면 엄마가 어떻게 돌아가나 싶었다. 


그 엉망인 집에서 윤서를 두 돌까지 키웠다. 산후풍인지 그 집에서 사는 동안 나는 매일 아프고 다음날엔 더 아팠다. 윤서도 끝없이 아팠고 남편과는 하루 건너 한번씩 다투었다. 아이가 어리고, 남편과 나는 새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에 부치고, 새로운 집은 어느 하나 맘에 드는 구석이 없고.. 기분이 좋은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다음 집은 정말 고민해서 고르자! 하고 의논하던 우리는 고민 끝에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주택대출이란 걸 받기로 했다. 걸어서 마트도 가고 싶고, 윤서를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할 수 있는지, 엄마가 오시면 주무실 방은 있는지를 찾아보며 꼬박 몇 달간 집을 구했다. 전세 만기 3개월 전 주인에게 통보 후 새로운 집 매매 계약서를 쓰고 오던 날 밤이 생각난다. 내가, 우리가 집을 산다고? 하며 몇 번을 되물어봐도 잠이 안 오던 날 밤. 그땐 몰랐다. 엉망이던 집이 끝까지 속을 썩일 줄은 


저 창문을 열면 앞집 밥상 메뉴도 보일만큼 촘촘하던 두 번째 집


우리가 이사 가는 날까지 우리 집에 들어오겠다는 다음 세입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전셋값이 전반적으로 내리기도 했고 집주인은 우리에게 돌려줄 전셋값이 없으니 법원에 가서 할 수 있는 한 해보라고 했다. 눈물이 났다. 1억을 어디서 구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다 결국 양가 부모님에게 조금씩 도움을 받았다. 어찌어찌해서 이사를 마치고, 결국 이사 후 3개월 되던 시점에 전셋값이 내렸다는 이유로 9500만 원밖에 받지 못했다. 500만 원이 누구 집 개 이름도 아닌데 집주인은 너무도 당당했다. 이 5백만 원에 스트레스받아 생각날 때마다 울고 불고 민사소송까지 준비해볼까 하던 차에 이사 나온 지 1년 만에 나머지 5백만 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내 주위 지인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첫 집을 매매하고 엉망이던 집을 이사 나오면서 마냥 행복할 줄 알았는데.. 전세금을 못 받은 것이 가장 슬플 줄 알았던 이삿날 한 달 전에 엄마가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저 작은 거실 소파에서 울고 또 울고 함께 이사해주겠다던 엄마를 원망하며 밤을 지새우곤 했다. 윤서를 저 집에서 키우던 2년간 엄마는 참 많이 와줬다. 어떤 날엔 주방에 종일 서서 반찬을 만들어주고 어떤 날엔 안방 침대에서 윤서와 둥가 둥가를 하기도 하고. 어떤 날 밤엔 윤서를 재우고 거실 소파에 기대앉아 드라마를 재미있게 봤다. 이사를 나오던 날, 짐이 다 빠진 거실에 서서 한참 동안 엄마를 생각했다.  


아기 80일에 이사 와서 엄마랑 이삿날부터 오롯이 2년을 키워낸 집.. 거실에 엄마가 앉아있을 것만 같고 주방엔 엄마가 서있을 것만 같고.. 이사하던 날 엄마가 해온 시루떡을 이 집에 첫 번째로 들이던 기억.. 엄마가 없으니 그런 거 챙길 사람도 없다. 하늘에서 날보고 저것 보라고 끌끌 혀를 차고 있으려나. 그러게 이사 같이 해주기로 가을부터 약속해놓고 새집 한번 와보지도 못하고 왜 그렇게 허무하게 약속을 어긴 건지. 현관문을 닫고 나가면 이 집에 엄마를 혼자 남겨두고 나만 가버리는 것 같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도 저 집 사진을 보면 어딘가에 엄마 흔적이 남아 있을 것만 같다. 


스무 살 먹었지만 우리에겐 두 살 같던 우리  세 번째이자 첫 번째 집

 처음으로 큰돈을 대출받아 이사 온 우리 집은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주거안정이 뭔지, 그게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느꼈달까. 매달 대출금은 나갈지 언정 2년 뒤 집주인이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고, 갑자기 나가라고 하면 어쩌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기관에 잘 다니고 있는 아이를 전학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나는 이전 집에서 내내 아프던 몸이 점점 낫는 기적까지 느꼈다. 물론 새로운 집에 엄마와 함께 오지 못했다는 슬픔에 이따금 사로잡히긴 했지만 말이다. 


 새로운 집에 1년남짓 살 무렵 남편이 나에게 말했다. 더 넓은 집에 살고 싶다! 고.. 나에게 주거안정이 내 집이라면 남편에겐 넓은 집이었다. 뭐 나도 인정은 했다. 미니멀 라이프와는 담쌓은 우리가 24평 아파트에서 보고 싶은 책 모두 쌓아두고, 리클라이너 소파도 들이고, 4인용 식탁도 두고 살기엔 너무 힘들지 하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2년도 채 못 산 집을 두고 양도세라는 벽을 넘을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벽이란 게 넘지 못하면 문을 만들어 열고 나가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연소득 6천만 원 이하까지만 디딤돌 대출을 또 받을 수 있대, 내년이면 가망 없는 거지" 남편의 혼잣말에 나는 또 한 번의 이사가 내 팔자라면 어차피 할 이사 빨리 처리해버리자 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이용하지만 또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는 -내 집 마련 디딤돌 대출-이라는 제도가 있다. 우리는 결혼 한지 꽤 되었지만 7년은 넘지 않았기에 첫 집을 마련할 때 받았던 디딤돌 대출을 신혼부부라는 조건으로 또 한 번 받을 수 있었다. 첫 집이 고맙게도 1년 만에 5천만 원이 올라주었고 이 차액을 바탕으로 양도세와 다음 집의 리모델링과 취득세 정도는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시작으로 살던 집의 위치는 너무도 만족했기에 바로 앞 길 건너 아파트의 33평형을 이리 보고 저리 보며 우리 것이 될 수 있을지 한 달을 고민했다. 그러다 구경만 가볼까 하던 날, 우리 집도 채 내놓기 전에 새 집을 계약하고 왔다. 좋게 말하면 추진력인데 나쁘게 말하면 미친 거라고 여러 친구들이 입 모아 말했다. 친구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우리가 살던 집을 열심히 쓸고 닦아 바로 부동산에 내놓았다. 당장 현금이라고는 천만 원이 전부였는데 새 집의 계약금 몇천을 당장 구해야 했다. 그러다 문득 그 돈을 쓸 시기가 왔구나 싶었다.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받은 생명보험금이 꽤 크다 보니 아빠가 자식 둘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었는데 나는 그걸 윤서의 대학 등록금으로 써야지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새 집에서 윤서가 행복하게 살길 엄마도 바랄 거라는 마음으로 보험금으로 새 집의 계약금을 해결했다. 


계약금을 필두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새 집의 주인들이 이사를 나가고, 리모델링 업체를 계약하고  (구) 아파트의 매도에 성공하고 그렇게 2020년의 8월이 지나갔다. 이사라는 것을 열 번도 넘게 해 보았지만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임했다. 남들이 그렇게 말하는 주거안정을 찾고 싶었다. 더 이상 넓은 집? 깨끗한 집? 전세금 못 받을 걱정 없는 집? 등등의 고민을 하지 않고 아이를 전학시키지 않으며 쭉 키울 수 있는 집.. 


어쩌면 꿈에서 보았을 나의 스위트홈


이삿날 집에 첫 발을 들여놓으며   일곱 살, 그날 밤. 우리 부모님도 나처럼 설레면서 두렵고 기쁘면서도 여러 감정이 교차했겠지 하고 생각했다. 수세식 변기의 물 내리는 레버가 신기해 그날 밤 무서운 줄도 모르고 화장실로 향하던 일곱 살이 어느 세월에 서른일곱이 되어 내 이름으로 된 집을 갖고 또 그날의 우리 부모를 생각한다. 


이제 정말 우리 10년은 살자 라고 다짐하며 이사 온 새로운 집은 넓고 푸근하며 시원하고 따뜻하다. 아침에는 해가 들고 저녁에는 시원한 바람이 든다. 앞으로는 아이들 노는 모습이 보이고 뒤로는 사람들이 어떤 차림으로 지나가는지 곁눈질로 보며 내 옷차림을 여밀 수 있다. 


사람에게 집이란.. 사는 것 (Live)이 아니라 사는 것 (Buy)이라는 말도 생긴 시대다. 하지만 옥탑방에서 보일러가 고장 나 얼음물에 머리도 감아보고, 도로가 1층 집에서 엄지손가락만 한 바퀴벌레와 동침도 해본 나로서는 집은 나에게 역사이며 설렘이다. 더 나은 나를 만들 공간이며 지쳐 쓰러지기 전 나를 누일 수 있는 온화한 종착지이기도 하다.. 다들 이사 몇 번이나 해보았는지..? 주거 안정을 찾아 미련하지만 성실하게 헤매던 지난날의 젊은 나에게 심심한 위로와 칭찬을 보낸다. 









작가의 이전글 집 떠나기 전날, 엄마는 고추장을 담갔다.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