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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수레 Nov 24. 2021

개인주의자의 엄마 표류기

- 임신을 확인하던 날,  임신이란 게 말이야..



임신해봤어? 내가 남편에게 30주가 넘는 시간 동안 가장 자주 했던 말이다.


임신 pregnancy, 姙娠

수정란이 자궁 내벽에 착상하여 모체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으며 태아로 발육하는 과정.


수정란이 자궁 내벽에 착상하는 과정이야 모두가 다 알지만 모른 척하며 살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했으니 그냥 넘어가고.. 모체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으며 태아로 발육하는 과정을 겪어본 사람들이라면 읽어보고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나야말로 임신을 할 수 있을지도, 하게 될지도 몰랐던 사람이었기에 누구보다도 준비 안된 임산부가 되고 말았다.


지금이야 난임, 불임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나아졌고, 산부인과에 가는 이유가 꼭 임신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방송이나 여기저기서 다뤄주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그렇지 못했다. 나부터도 첫 월경을 열다섯 살에 시작했지만 첫 산부인과는 스물여섯 살에 갔으니 산부인과의 벽이 얼마나 높았던지 이제야 실감이 난다.


스물여섯 살,  애초에 월경을 시작할 때부터 주기랄 것이 없을 정도로 불규칙적이었다. 대부분이 그렇듯 그냥 그렇구나 하고 살았고, 사실 그때까지 성경험도 없었다. 모든 정황상 산부인과를 갈 일이 없었던 나였기에 약간은 내 일이 아니라고 여기고 지내오던 중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부정출혈'(정기적이지 않은 출혈 = 생리가 아닌 출혈)이 보름간 지속되어 나는 별 수 없이 소가 도살장 끌려가듯 여의사가 있는 산부인과를 수소문해 생전 처음으로 산부인과에 내원하게 되었다.


병명은 "좌측 난소의 기형 신생물, 크기는 약 8cm"


얼떨떨했다. 어디 붙어있는지 나도 잘 모르는 내 난소에 8센티나 되는 기형 신생물이라니. 쉽게 말해 왼쪽 난소에 물혹이 아닌 단단한 혹이 8센티나 되는데 그냥 둘 수 없는 크기와 모양이라 제거와 동시에 이게 악성종양(암)인지 확인해 봐야 한단 것이었다. 난 아직 결혼도 안 했고, 당연히 출산도 안 했고 아직 내 난소는 열일 할 날이 구만리인데.. 이 기형 신생물의 위치가 얄궂어서  나는 결국 세 곳의 대학병원을 전전하고도 왼쪽 난소를 절제하고 말았다.


다행히 암은 아니었다. 그냥 왼쪽 난소를 잘라냈을 뿐. 의사는 새로 들인 로봇수술기계가 좋아서 배꼽을 약간 벌려 수술하고 이외의 상처는 없을 것이라고 위로해주었다. 그 말은 사실이었고 수술한 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배꼽이 약간 볼록할 뿐 다른 상처는 고맙게도 없다. 문제가 있던 왼쪽 난소를 잘라내니 문제가 없던 오른쪽 난소가 열 일하기 시작했다. 질서 없던 생리주기가 난생처음 35일을 맞춰가며 달력에 그림을 그리고, 턱에 마를 날 없던 뾰루지가 이제야 멀끔히 사라지기도 했다.


수술 후 1년 뒤 정기 검진 날 의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임신엔 문제가 없을 거예요"였다. 그 말인즉슨 남은 난소 하나도 열일 하고 있으니 쉽사리 불임이 될 일도, 문제가 생겨 폐경이 될 일도 딱히 없을 거란 말이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3년간 임신은 되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화학적 유산 조차도 겪은 적 없으니 365일을 세 바퀴 돌고도 착상조차 한 번도 되지 않은 것이다. 남편과 나는 아이를 꼭 낳아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생각이지만 아마도 내가 아주 예전에 했던 수술로 인해 임신이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배경이 기저에 깔려있지 않았나 싶다. "난 꼭 임신할 거야!!, 아이를 꼭 가질 거야!!"라고 마음먹었다가 임신이 되지 않을 때의 상실감을 느끼느니 미리 쿨한 척 포기하면 그런 절망감은 덜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3년간 임신이 되지 않았다는 걸 인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난소가 한쪽뿐이지만 뭐하나 빠지는 것 없다고 생각했는데 임신이 안 되는 상황은 의외로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비슷한 상황에 결혼한 친구들은 모두 아이를 낳고 키우고 고만고만한 일상을 살아가는데 나 혼자 자유로운 영혼 인척, 큰 결심한 딩크족 인척 살아야 했다. 사실 난 거기까진 아니었는데 말이다.


남편과 몇 번의 상의를 거친 후에 난임 병원을 한 번은 다녀야 후회가 없을 거라는 결론에 병원을 예약함과 동시에 해외로 가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나마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을 다녀와서 난임치료를 시작하자는 마음에서였다. 모두들 그렇지 않을까?,, 다이어트하기 전에 먹고 싶은 걸로 폭식하고 시작하자는 그 마음!


계획한 여행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 달 따라 규칙적이던 생리주기가 엉망진창 와장창 마냥 시작도 끝도 없이 소식이 없었다. 수영도 하고 밤새 술도 마셔야 하는데 가서 시작이라도 하면 내 여행 누가 보상하나 라는 마음에 심난해하고 있는데 그날따라 어수선한 화장대에서 눈에 띄는 딱 하나 남은 테스트기.. 운명 아니고 아이와 나의 인연의 시작이라고 해두자.


"임신 7주 넘어가고 있네요, 아기 보이죠?"


네.. 아주 잘 보입니다.. 다음날 부랴부랴 내원한 산부인과에선 약간의 타박과 한 움큼의 축하를 받았다. 왜 이제 왔느냐, 엄마가 이렇게 둔해서야.. 에 이어 언제 결혼을 하셨나요, 3년 차이면 축하할 일이네요, 등등 흔히 말하는 젤리 곰을 첫 내원에서 봐버렸으니 나는 엄청나게 둔하고 늦은 엄마가 되었다.

그날의 영광 "산모수첩"

꽉 찬 5년이 지나가는데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산모수첩을 한 손에 들고 남편과 친정엄마와 시어머니에게 차례대로 전화를 하던 그 순간, 내가 이런 일로 모두에게 기쁨을 주게 되다니 이런 관계성에 또 한 번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되던 날.. 하지만 그 깊은 생각은 아주 별 것 아닌 일이었음을 미처 몰랐다.


2016년 어느 금요일 저녁, 유통기한이 1년이나 지난 임신테스트기로 내 인생 2막을 시작하게 되던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며, 하나에서 셋이 되는 이야기를 담백하게 이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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