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함은 용서 가능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속이는 건 범죄야!
얼마 전, 예능프로그램에 노래 한 곡으로 '초대박'을 터트린 가수가 출연했다.
가수의 이름은 생소할 수 있지만, 제목을 듣는다면 단번에 알만한 그 노래...
근래 들어본 노래 중에서 아마 가장 듣기 편한 노래가 아닌가 싶다. 요즘 아이돌 노래는 집중을 해도 가사를 알아듣기 힘들지만, 이 노래는 그렇게 집중하지 않았음에도 내 귀에 가사가 쏙쏙 박혀준다.
그런데 예능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건 노래를 부른 '황가람'이 아니었다.
원곡자가 따로 있다는 걸 그때서야 처음 알았다. 바로 '정중식'이라는 가수라고 했다.
처음엔 반응 자체가 없었는데 황가람이 부르면서 역주행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빌보드를 비롯해 유명 음악차트 상위권에 순위가 오르고, 다수 연예인들이 서로 앞다퉈 커버곡으로 영상에 올리는 등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적이었다.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가장 중요한 돈... 저작권료!
실연자인 황가람은 저작권 수입 제로! 반면, 정중식은 '경차 풀옵션' 값이 매달 통장으로 입금된다고 했다.
정말 '정중식'이라는 가수는 노래 한 곡으로 '인생역전 시켰다'는 말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인물인 것 같다.
그런데 문득 드는 생각이...
그 시절 가장 인기 있는 노래를 확인할 수 있는 주요 척도는 요즘처럼 음방이나 차트가 아니다.
바로 '길보드 차트'에서 자주 틀어주는 곡이 최고 히트곡이었다. 이는 리어카나 트럭에서 불법 복제, 복사한 테이프를 길에서 틀고, 판매하는 행위를 말한다. 당시에는 가수 한 사람의 노래를 테이프 하나에 담기도 했지만, 이보다 가수, 장르 구분 없이 최신 인기곡들을 짬뽕시켜 하나의 테이프에 담아 불법으로 복제하여 판매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나 역시 매장에서 정식으로 테이프를 샀던 기억은 없는 듯하다. 당연히 여러 가수들의 노래가 담겨있는
테이프를 싼 가격에 구입하는 게 더 이득이었기에... 2~3천 원 수준이었던가?
금전적으로만 본다면 소비자에겐 이득이지만, 창작자에겐 제로에 가까운...
아니 어쩌면 마이너스와 같은 손실을 입혔던 셈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래 한 곡을 만들기 위해 시간과 열정을 쏟아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금전적 보상을 받을 수 없었다. 구조 자체가 그랬다.
당시에도 물론 불법 복제, 복사에 대한 우려와 문제는 제기되었지만, 사회적인 문제로 확산시킬 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 음원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비디오테이프, 게임 CD 등 해당되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로 불법 복제가 성행했었다. 이에 따른 죄책감도 크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범죄라는 생각 자체도 못했었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자연스럽게 복제 테이프를 길거리에서 돈을 주고 구매하는 모습이 일상적이었고, 사람들이 붐비는 장소에서도 당당하게 불법 복제물을 떡하니 팔고 있었다.
심지어 경찰들도 어떠한 제재를 가하거나 문제로 삼지 않았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러니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반딧불'이라는 노래가 이 당시 발매되었다면, 추측해 보건대 원곡자 중식 씨는 결코 현재와 같은 호사를 경험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왠지 억울함에 치를 떨고 있었을 수도...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난 저작권자의 창작물을 아무런 동의 없이, 무단으로 사용한 경험들을 꽤 많이 가지고 있는 듯하다.
잠깐 동안이나마 지나간 과거지만 이 기회에 반성의 시간을 가져봐야겠다.
대학 시절 전공 서적은 수업시간 필참이었다. 그런데 책값은 만만치 않고, 돈은 부족해 새책을 사는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 때, 누군가 종이 한 장을 돌린다.
아무래도 복사본이 새책보다 훨씬 싼 편이기에 대다수가 신청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행위는 노래 테이프와는 달리, 뭔가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조금은 인지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서적 앞면에 [본 도서를 무단으로 불법 복제, 복사하는 것을 금지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기에.그렇지만 이 역시, 이전부터 관행처럼 이어져 왔기에 큰 죄책감은 느끼지 못했었다.
아니, 하면 안 될 것 같다.
이제는 뭔가 처벌을 받을 것 같다는 불안감과 명백하게 잘못된 행위라는 것임을 잘 알고 있기에!
그렇다면 그때와 지금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 왜 그때는 되고, 지금은 안된다고 생각하게 된 걸까?
아마 시대가 변했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인식도 달라진 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과거에 비해 요즘엔 유, 무형에 대한 구분 없이 창작자의 저작권 보호를 강화해주고 있는 실정이다.
법 테두리에서 뿐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도 아무런 노력 없이 타인이 만들어 놓은 것을 무단으로 도용하거나 아무 죄책감 없이 자기가 한 것처럼 무작정 베끼는 행위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강한 비판을 가하는 모습들이 이제는 어느 정도 고착화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정말 모르고 한 행동이라면, 그 무지함에 대해 탓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서 알려주면 된다. 잘못된 행동이니 앞으로는 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하고 그 행위를 한 것이라면 그건 더 이상 무지나 실수의 영역으로 봐줄 수 없는 것이다.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행위다.
나 또한, 글 한 편 쓰는데 최소 2시간 이상 소요되고, 어떠한 방식으로 작성할지 고민하다 보면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힘겹기도 하다. 그래도 완성된 글을 보면 성취감도 느껴진다.
그것이 좋은 글이든 그렇지 않든 크게 상관없다.
온전히 글 속에는 나의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져 있기에 그저 소중할 따름이다.
창작물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창작자의 저작권은 더 보호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다수의 사람들은 창작물의 완성품만을 보게 된다. 그것이 완성되기까지의 고된 과정은 잘 알지 못한다.
알아야 할 이유도 없지만...
그러기에 창작자의 저작권에 대해 더 소홀히 생각하고 죄책감 없이 도용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아직도 '저작권'을 단순하고 하찮은 권리로 인식하는 누군가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창작의 고통'이라는 말이 있다.
간혹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산고(産苦)의 고통'과도 맞먹을 정도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만큼 '창작'이라는 것이 쉽지 않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기에 앞으로 저작권에 대해 '더 존중하고 보호해주어야 할... 그리고 값어치 있는 권리' 로서 그 대상을
받아들이고 인식해 나가야 하는 것이 창작자를 위한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전하며 긴 글을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