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영상 수업 날이었다. 영상선생님과 함께 자신들만의 단편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감독은 영상선생님, 편집은 마루, 촬영과 조연은 새온과 도담, 그리고 주인공은 누리가 맡았다.
"자, 오늘 너희가 그동안 짜온 시나리오로 진짜 영화를 찍어볼 거야. 오늘 찍는 분량이 많으니까 부지런히 해보자." 영상선생님의 설명에 아이들은 눈을 반짝였다. 영상수업은 언제나 재미있었다. 손에 쏙 들어오는 카메라 하나로 영화처럼 찍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아이들의 짠 시나리오에는 10년 전 현서분교를 다녔던 한 소년을 지금의 현서분교 아이들이 목격하는 이야기였다.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전학생이야기였다. 조금은 으스스한 이야기는 과학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과학실은 2층 복도 끝에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밤이면 이상한 소리가 나거나, 누군가가 다닌다는 소문이 있었다. 처음으로 그 전학생을 발견하는 주인공은 '누리'였다.
새온은 카메라를 들고, 도담은 반사판을 들었다. 마루는 노트북을 펼쳐놓고 촬영 분량을 체크할 준비를 했다.
"자, 첫 장면! 누리가 교실 문을 열고 나오는 거야. 준비, 액션!"
영상선생님의 신호와 함께 누리가 문을 열고 걸어 나왔다. 그런데 첫걸음을 떼자마자 누리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컷! 누리야, 왜 웃어?"
"아, 미안해요. 새온이가 카메라 들고 있는 모습이 너무 웃겨서…"
새온이 카메라 뒤에서 얼굴을 찌푸렸다. "뭐가 웃겨. 나 진지하게 찍고 있는데. 지금 무서운 내용 찍고 있는데 왜 웃는 거야?"
"그게 더 웃긴 걸 어떡해!" 누리는 배를 잡고 웃었다.
다시 시작. 이번엔 누리가 대사를 하다가 또 웃음을 터뜨렸다. 세 번째, 네 번째… NG는 계속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들은 촬영이 힘들다고 느껴졌다. 새온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고, 반사판을 들고 있던 도담의 팔은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도담아, 반사판 좀 가만히 들고 있어. 빛이 자꾸 흔들려."
"미안, 팔이 너무 아파서…"
몇 번째인지 모를 NG가 났을 때, 새온이 카메라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진짜. 누리야, 제발 좀 집중해 줘. 우리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새온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새온이 목소리를 높이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정말 미안해. 나도 모르게 자꾸 웃음이…" 누리의 얼굴이 빨개졌다.
"우리도 힘들단 말이야. 이렇게 더운데 계속 서 있어야 하는 거 알아?" 도담도 반사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평소에 불만을 표현하지 않는 도담까지 이러니, 누리는 더 미안해졌다.
어렵게 과학실 촬영을 마치고 그늘에 모두 모였다. 영상을 확인하던 마루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이게 뭐야..."마루가 노트북 영상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NG 영상만 스무 개가 넘어! 제대로 찍힌 게 하나도 없잖아. 이걸 어떻게 편집하라는 거야!"
마루의 목소리가 운동장에 울렸다.
누리는 화가 난 친구들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웃으면서 촬영하면 다들 재미있게 찍을 거라 생각했다. 누리의 생각과 다르게 친구들의 표정이 지쳐 보였다. 누리는 친구들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목구멍까지 '미안해'라는 말이 올라왔지만, 차마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다.
뜨거운 햇볕 아래, 네 아이는 각자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영상선샌님은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가가서 아이들에게 뭐라고 말해줄 수도 있었지만, 선생님은 일부러 자리를 피해 주었다. 아이들이 스스로 해결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누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얘들아." 입술을 깨물며 용기를 내보았다. 평소 어떤 말도 자신 있게 하던 누리였지만, 오늘은 친구들에게 말이 잘 떨어지지가 않았다.
"내가 진짜 못해서 미안해. 근데 있잖아…." 누리는 친구들의 얼굴을 한 번씩 바라봤다. "우리가 만드는 영화잖아. 나 조금 못해도 이해해 줘, 그게 우리만의 영화니까 괜찮지 않을까?"
새온이 고개를 들어 누리를 바라봤다. 누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들이 처음 찍는 영화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잘 찍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새온 자신도 촬영이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러게.. 그냥 우리끼리 해보는 영화 촬영인데... 다시 하면 되지." 도담이 조용히 말했다.
"나도... 너무 짜증내서 미안해." 마루도 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영상선생님이 다가왔다.
"자, 얘들아! 기분 전환 좀 할까? 오늘은 특별히 야외 촬영 가는 거야. 학교 뒤쪽 계곡으로!"
"계곡이요?" 아이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응. 거기서 진짜 자연스러운 모습 찍는 거야. 물놀이하면서 노는 장면. 그게 더 멋진 영화가 될 것 같지 않아? 아, 근데 몽선생님한테는 비밀이야. 몰래 다녀오는 거지!"
"몽 선생님 몰래요?"
"쉿! 나중에 완성된 영상 보여드리면서 깜짝 놀라게 하는 거야."
아이들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몽 선생님을 놀라게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계곡으로 향하는 길, 아까의 무거운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졌다. 새온이 장비 가방을 메고, 도담이 간식 봉지를 들고, 마루가 노트북을 안고, 누리가 신나게 앞장서서 걸어갔다.
계곡에 도착하자 시원한 물소리가 불편했던 마음을 모두 씻어주는 것 같았다. 맑은 물이 반짝이며 흘러가고, 멀리 나무 그늘이 서늘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와, 시원해!" 누리가 제일 먼저 신발을 벗고 물에 발을 담갔다.
영상선생님은 드론을 띄웠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계곡과 아이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기기 시작했다.
새온과 도담도 물에 들어가 서로에게 물을 뿌렸다. 마루는 바위에 앉아 발을 담그며 웃었다. 누리는 양팔을 벌리고 물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자, 이제 자유롭게 놀아봐! 카메라 의식하지 말고!" 영상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은 진짜로 놀기 시작했다.
웃고, 뛰고, 소리 지르고, 물을 뿌리고. 아무도 NG를 걱정하지 않았다.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은 채, 그냥 친구들과 여름날 계곡에서 노는 평범한 아이들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 나무 뒤에서 몽 선생님이 조용히 서 있었다. 영상선생님에게 미리 연락을 받고 몰래 따라온 것이었다. 아이들에게는 비밀이었지만, 선생님들은 알고 있었다.
아이들의 진짜 웃음소리가 계곡을 가득 채우는 모습을 보며, 몽 선생님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하교시간이 되어 학교로 돌아온 아이들은 여전히 신이 나 있었다.
"오늘 진짜 재밌었다!" 새온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 계곡에서는 잘하지 않았어?" 누리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어! 노는 장면은 NG가 없네." 마루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누리를 향해 위아래팔을 벌려 손바닥을 부딪쳤다.
"선생님. 우리 원래 찍으려고 했던 부분이 바뀌었는데 괜찮아요?" 도담이가 바뀐 영화 부분이 걱정이 되었는지 선생님께 물어봤다.
"그럼. 오히려 바뀌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잘 찍힌 거 같은데?"
"그럼 저희 2학기때도 영화 또 찍을 수 있어요?" 마루가 폴짝거리며 선생님 옆으로 뛰어오면 말했다.
"당연하지! 너희가 하는 모든 걸 다 영화로 만들 수 있지!" 영상 선생님은 활짝 웃고 있었다.
선생님은 그 모든 것이 담긴 영상이야말로 진짜 의미 있는 영화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