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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ergeia Aug 11. 2024

서촌 그 책방

종무식이 준 선물

2023년 종무식인 12월 29일 금요일, 회사는 3시에 업무를 마무리하라고 하였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주 금요일 7시에는 집 근처에서 폴댄스를 하는데, 갑자기 주어진 자유시간 동안 내게 진정한 자유의 공간인 동네책방에 머물고 싶었다. 5시경, 수강인원 미달로 폴댄스 강좌 취소 메시지를 받자 책방의 장소적 제한이 사라졌다.

그렇게 해서 가게 된 서촌 그 책방.


서울형책방 팸플릿에서 처음 알게 된 곳이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운치 있는 서촌에 한옥으로 된 책방이라니, 책방지기님이 직접 읽고 권할만한 책들이 엄선되어 있는 곳, 책 표지 앞에 수기의 추천사가 붙어 있는 곳, 책방지기님의 손길이 오롯이 느껴지는 공간으로 나는 들어가졌다.




“어서 오세요”

책방 안에 다 들어가기도 전에 기품 있는 목소리가 먼저 나를 반겼다. 무거운 가방과 노트북은 탁자에 올려두고 거추장스러운 두꺼운 패딩을 벗어 의자에 걸쳐둔 채, 찬찬히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벽에 붙어 있는 독서모임 회원 모집과 임승훈 작가가 이끄는 글쓰기 강좌 안내를 보다가 눈길이 멈췄다.

“글쓰기는 사유를 담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사유를 시작하게 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블로그를 하면서 생각의 명시화, 가시화 역할을 하는 글쓰기의 놀라운 능력을 실감하고 있는 찰나였다. 지인의 말도 떠올랐다. ‘책은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기에 반드시 읽어야 한다. 그 울타리가 넓어진 곳에 자기 작물을 심어야 한다’. 책방에 있는 책을 보면서도 자꾸만 저 문구를 흘긋흘긋 거렸다. 기억하고 싶어서.

책방에 있는 시집과 에세이집을 보고 다른 쪽으로 가니 책방지기님이 고르고 고른 20권의 책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 책들은 책방지기님의 생각의 흔적인 끄적임과 인덱스로 가득한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중 하나의 책을 들고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탁자 위에 걸터앉았을 때였다.  

“전에 몇 번 오셨었나요?”

책방지기님이 내게 물으셨다. 내가 처음이라고 대답하자 어떻게 알고 왔는지를 물으셨다. 책방 소개 팸플릿에서 보고 방문 리스트에 저장해 두었는데, 마침 오늘 회사가 일찍 끝났고, 책방에서 한 해의 마무리를 하고 싶어서 오게 되었다고 하였다(나중에 알고 보니, 책방지기님은 들어오자마자 탁자에 짐을 올려놓을 뿐 아니라 겉옷을 턱 하니 벗고 자연스럽게 책방을 둘러보는 나를 보면서, 이전에 많이 온 사람인가? 취재를 하러 왔나? 하는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내가 너무 ‘자기 책방’에 들어오는 사람처럼 편안하게 행동했다고 한다).  ​

“차 한잔하실래요?”

선뜻 내주시는 차를 거절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내어주시는 따뜻한 차를 감사한 마음으로 마시면서 책방지기님과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책방지기님은 본인이 책방 주인이 될 거라고 생각해 보지 않으셨다고 한다. 책방을 하고 싶은 생각이 가득한 나는 순간 주체할 수 없는 궁금증이 차올랐다. 계획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 자리에까지 오게 되신 것인지. 책방지기님의 인생에는 늘 책이 함께였다고 한다. 국어 국문과를 졸업하였고, 기자도 했으며, 오랜 기간 독서지도를 하셨다고 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아이들 대상으로 독서지도와 논술지도를 하고, 이후에는 성인 대상으로도 하셨다고 한다. 독서지도를 하려고 출강을 많이 다니셨는데 밖으로 다닐 것이 아니라 장소를 가져서 그 공간에서 독서지도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이 지금의 모습으로 이어졌다고 하신다. 독서지도사 일을 그만두고 1년 동안 쉬면서 다른 책방도 여러 곳 방문했는데 대부분 20~30대의 젊은 사람들이 운영하고 있어서 책방지기님의 연령대가 의외로 희소성이 있겠구나는 생각을 하셨다 한다. 그리고 실제로 이곳에서 진행되는 독서모임의 회원도 20대부터 6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해서, 세대를 뛰어넘어 더욱 다양하고 농밀한 대화가 이루어진다고 하셨다. 독서모임은 학기제로 5개월 단위(4월~8월, 10월~2월)로  운영하고 1개월은 쉰다. 쉬는 동안에는 독서모임 회원 중 책을 소개해 주실 수 있는 분들의 지원을 받아 일일책방지기를 맡기신다고 한다. 나는 경상남도 남해의 <아마도 책방>도 일일책방지기 체험 신청을 받는다는 말을 하면서 “멀리 가지 않고 여기에서도 가능한 것이었네요”라고 하였다.

서촌 그 책방의 특장점은 위와 같은 독서모임일 뿐 아니라 국내 작가 위주의 책방이라는 점도 있다. 책방지기님이 결혼 이후 외국에서 10년을 살면서 우리말, 우리글을 읽고 표현하는 것에 대한 결핍이 있었고, 번역서의 전달력에 한계를 느꼈기에 국내 작가 위주의 책을 소개하신단다. 어쩌다 1~2% 있는 번역서는 대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외국 작가의 책이라고 하셨다. 이렇게 거의 국내 작가의 책을 소개하는 것은, 한글로 글을 쓰기 시작한 우리의 짧은 역사 속에서 우리 작가의 책이 널리 읽혔으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으신 거 같았다. 우리 작가의 글은 많이 읽지 않으면서 노벨문학상만을 바라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개탄하실 때는 나도 찔리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독서는 단순히 작가의 글을 읽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의 삶과 ‘연결’시켜야 하기에, 독서모임에서 회원들이 발췌/요약만을 하고 있으면 여기서 더 나아가 본인이 느끼고 생각한 것을 이야기하게끔 끌어내신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책 표지에 붙여진 추천사에 책 내용이 전혀 없었던 것이 떠올랐다. ‘다음이 기대되는 작가’, ‘순식간에 읽어버릴 흡입력’, ‘재미를 찾고 있으면 이 책이 딱’, ‘이 작가의 다른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면 이 책부터’ 등등 책방지기님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상평이 적혀있는데, 이게 또 묘하게 매력적인 게 책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시가 너무 어렵다는 이야기를 꺼냈더니, 시는 원래 어려운 것이라고 한다. 시인이 하나의 시를 창조하기 위하여 한 달간 고민한 것을 1분 만에 읽고 바로 이해를 한다면 그 시인보다 더 천재적인 사람일 것이라고 하면서. 정제되고 정제된 언어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길이라고 하신 것과 시 전부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이 내게 위로로 다가왔다. 쇼펜하우어의 명언도 떠올랐다. ‘읽은 것을 모두 간직하려고 하는 것은 먹은 것을 모두 체내에 담고 있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

김천의 중학생들이 서촌 그 책방을 방문하여 <선릉 산책>으로 대담 형식의 독서모임을 진행한 적이 있는데, 아이들은 서울 견학 중 이 독서토론이 가장 인상 깊었다고 했단다. 책방기기님은 앞으로 책방 밖에서의 교육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임하고 싶다고 하셨다.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으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꿈이 있는 자의 생동감을 마주했고 꿈(배움)이 있는 자는 늙지 않는다는 것이 생각났다.



일 년 내내 책 표지만 많이 봤던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서촌 그 책방에서 발간한 독서모임 회원들의 에세이 모음집인 <소란이 무르읽는 시간>을 손에 들었다. 책방지기님은 <아버지의 해방일지>에 대하여,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너무 무겁지 않게 표현하고 있으며, 정지아 소설가가 그동안 빨치산을 주제로 쓴 다수의 책들은 이 책을 쓰기 위한 소재인 거 같다고 하셨다. <소란이 무르읽는 시간>은 오늘 만난 책방지기님과 직접 관련이 있어서 아는 사람을 책으로 만날 거 같은 친근함이 기대되었다. 책방지기님은 책을 담아 주시면서 감사하게도 서촌 그 책방이 예쁘게 그려진 책갈피도 선물로 주셨다.

책방이라는 새로운 길을 알게 된 2023년 마지막을 책방으로 마무리할 수 있어서, 책방지기님과 소중한 대화를 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책방에 오면 늘 마음이 충만해져서 나가게 된다고 하니, “충전소네요”라고 웃으면서 말씀하신다. 4시 30분 즈음 이곳의 문을 연 나는 문을 닫는 시간 직전인 6시 50분경까지 그곳에 존재했다. 책방지기님은 오늘 처음 만난 나에게 귀한 시간과 자신을 내어주셨다. 책방지기님과 함께 나눈 대화가 뜻밖의 선물이 되어 내 마음에 내려앉았기에,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또 만나요.”라는 마지막 말은 헤어질 때 하는 인사가 아닌 것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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