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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ergeia Aug 13. 2024

고호의 책방

지방 출장이 신났던 이유

2023년 7월 4일, 업무 때문에 목포에 가야만 했다.

일이 시작되는 시간은 오후 2시였고 아무리 늦어도 오후 4시에는 끝날 것으로 예상되었다. 시간을 잘 맞춘다면 오후 4시 41분에 목포에서 출발하는 SRT에 몸을 실을 수도 있겠지만 장담할 수는 없기에 내려가는 편도만 예매한 애매한 상황이었다. ​


목포는 난생처음 가 본다.

새로움이란 무엇이든 설렘이 앞선다.​


서울과는 지리적으로 상당한 거리에 있는 목포까지 가는데 ‘용건만 간단히’ 하기에는 내심 아쉬웠다. ‘뭐 할까?’라는 의문문이 끝나기도 전에 ‘목포 동네책방’을 검색하였다. 목포역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고호의 책방’을 알게 된 후에는, 업무를 마치고 책방에 간다는 생각에 목포에 매우 가고 싶어졌다.

목포에 가는 현실은 변함이 없는데, 타의적으로 주어진 의무에서 자율적인 선택지를 추가하고 나니 목포에 대한 나의 감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렇게 마주한 고호의 책방.

청주의 ‘여름서재’가 close 인 것을 모르고 무작정 방문했던 경험이 있어서, 이곳이 오후 8시까지 open 임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오후 8시 21분에 출발하는 SRT 열차표를 끊었다.

이제부터는 여유롭고 평화롭게 고호의 책방을 들여다보면서 온전히 몰입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의 전부였다. 책방의 네이밍에서 알 수 있듯이 반 고흐 그림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고, 화가/미술/그림/예술/색감 관련된 책이 전체 책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특색이 강한 곳이었다.

아라이 미키의 <색이름 사전>, 법정스님의 <스스로 행복하라>,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의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노미경, 장동익, 가재산의 <스마트폰 하나로 세계여행 떠나기>, 김보희 그림산문집 <평온한 날>을 가볍게 들추어보다가 드디어 구입할 책을 골랐다. 최필조 사진가님의 <말할 수 없어 찍은 사진, 보여줄 수 없어 쓴 글>이었다.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교사로서의 삶과 사진가로서의 삶이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담아내는 일입니다. 둘은 다르지 않습니다.

<말할 수 없어 찍은 사진, 보여줄 수 없어 쓴 글> 작가 소개 중


작가 소개의 마지막 문장은 나를 책 속으로 깊이 빠지게 하였고, 여섯 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여는 글을 다 읽기도 전에 이 책은 나와 함께 서울로 가는 걸로 정해졌다. 함께 할 책을 고르고 나서 주저 없이 책방지기님에게로 갔다.

“바쁘세요?”

무언가 작업을 마무리하시는 중이라던 책방지기님은 바쁘지는 않다고 하셨다. 스스럼없이 말을 걸 수 있었던 것은, “궁금한 건 주저 말고 물어보세요”라고 책방 내에 걸려 있던 문구와 책방선인장에서 책방지기님과의 대화의 경험이 한몫하였지만, 무엇보다도 독립책방을 운영하시는 책방지기님의 인생에 대한 궁금증이 너무나 컸었기 때문이다.

책방지기님은 서울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30년 정도 하셨고, 은퇴 후 귀촌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 때문에 신안에 왔다가 들른 목포의 모습(지난 100여 년간 시간이 겹겹이 쌓여있는 듯)에 반해서 5년 전에 목포에 자리를 잡았고 책방을 운영한 지는 3년 6개월 정도 되셨다고 하였다. 10여 년 전 홍대의 땡스북스를 접하시면서 언젠간 책방을 해야지 하는 생각이 있으셨다면서.

​책방에 오셔서 가볍게 둘러보고 가시는 분, 둘러보다가 공간에 대한 좋은 느낌을 건네고 가시는 분, 책방에 들어온 지 한참 되었는데 오랜 시간 머물면서 책을 보시는 분, 책을 매개로 함께 대화를 나누게 되는 분 등 어떤 방문도 좋은데, 그중에서도 제일 기쁠 때는 책방지기님이 매일 2시간 넘게 심사숙고하여 입고한 책을 구매하여 가시는 분을 만날 때라고 하신다. ​책방을 하시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서울에서 계속 살았으면 몰랐을 거라고 하셨다.

“말해 놓고 보니 장점이 많은 직업이네요”라고 웃으시는데, 흘러 지나가듯이 말씀하신 ‘놀이터 오듯이 책방에 온다 ‘고 하신 것에서 이미 장점이 단점을 훨씬 능가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막 40대가 된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자, 책방지기님도 41살에 생각의 전환점이 있었다는 경험을 이야기해 주시면서 그 과정을 거치고 나니 자유를 느꼈다고 하셨다. 이 외에도 책방지기님과 나는, 사람이 생각하는 가치의 방향, 깨어있음의 깨어있음, 연결, 능력의 재발견, 나를 볼 수 없는 눈의 구조, 숫타니파타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육아의 대원칙(아이마다 자기 밥그릇은 가지고 태어나고, 부모의 가치관이 바르게 서 있으면 아이들은 잘 자람) 등 많은 주제를 오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대화 내내 보여주신 인자한 눈빛과 따뜻한 표정 덕분에 더욱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설 수 있었던 거 같아 감사한 마음 가득이다. 또한, 책방지기님이 직접 내려 주신 커피의 맛과 향도 예술적인 책방과 감성적인 BGM이 어우러져서 오랫동안 각인될 거 같다.

책방지기님과 나는,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2시간 넘게 대화를 지속하였는데, 책이 매개가 될 수 있다면 누구와도 친구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사람이란 없다.
아직 만나지 않은 친구가 있을 뿐이다.

아일랜드 속담


사람의 거리는 마음의 거리라고 했던가.

목포와 서울의 물리적 거리는 310km인데, 나는 금방이라도 다시 책방지기님을 만날 것처럼 가볍고 경쾌하게 인사를 나누면서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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