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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일 Sep 23. 2024

사진 속 추억으로 거리 두기를 배우다.

사진 속 추억으로 거리 두기를 배우다.      

 

  코로나19가 부쩍 뉴스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의 감염이 많은가 보다. 과거의 거리 두기가 부활하지는 않을지 걱정된다. 하지만 감염률 대비 사망이 적고 활동이 낮아 다행히 그런 일까지는 오지 않을 모양이다. 하지만 언제 다른 바이러스 유형으로 우리를 불안 속으로 밀어 넣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기후변화로 시베리아 동토에 수백 년 잠자던 바이러스들이 지상으로 활개 칠 날이 도래했다는 소식을 텔레비전에서 본 것 같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있다. 어쩌면 시간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갇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간 속에서 기억을 더듬기 위해 우리가 남기는 건 사진이다. 요즘은 디지털사진이라 저장만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아날로그 세대와 다른 점일 것이다. 인화해서 간직하던 우리와는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직장에서 우수사원으로 차출되어 유럽을 선진지견학을 갔던 곳 프랑스 파리가 생각났다. 그리고 프랑스 하면 파리고 파리하면 박물관 등 옛 고전이다. 안갯속에서 햇살 비추듯 슬그머니 기억이 났다.     

 

  오랜만에 파리를 기억해 내려고 추억창고를 찾았다. 비닐 속에 먼지로 살포시 엷게 재포장되어 있다. 표고버섯농장의 참나무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는 앨범을 꺼내 보았다. 변화의 세월 속에 아날로그인 앨범 속 사진은 주인의 관심에 미소를 지으면 앨범 속에서 밝게 맞아주고 있다. 낭만이 넘치는 센 강 변, 에펠탑, 그리고 성베드로 성당, 무슨 미술관인데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거리지만 비너스 사진을 꼭 찍어가야 한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셔터를 눌렀던 곳 등 기억 세계를 과거로 돌아가 본다. 디지털이 대세라 요즘 펼쳐보지도 않고 방치되어 있던 앨범을 보자 아날로그 시대를 풍미했던 유물을 가져 나오는 기분이다. 얼마 전 올림픽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센강물을 보면서 한강 물을 정화를 위해 노력한 대한민국 저력을 알 것 같았다. 역시 대단한 민족이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     

 

  사진을 살피다 보면 사진 속의 인물이 작게 나온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간직하고픈 목적물에 집착하여 정작 사람을 놓친 경우다. 목적을 이루려면 목적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목적만 생각하다 보면 자칫 정말 가치로 생각할 소중함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진을 찍으면서 원근법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화면 속 사물을 보면서 셔터를 누르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리는 목적에 너무 충실해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옳다고 자신만만하게 주장하는 동물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 소수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시민의식이 아쉬운 대목이다. 정치하는 사람도, 사업하는 사람도, 자영업을 하는 사람도, 노동을 하는 사람들도 한결같다. 자기만 주장하고 관철하려고 상대는 악마화한다. 하지만 세상사가 어디 그런가? 내가 있다는 것, 너 가 있기에 상대적으로 우리가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없는 존재가 존재일까? 하여간 우리 사회가 앨범 속 사진처럼 밝게 웃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동네 인심으로 품앗이해 주고 담이 없어도 이웃을 겁먹지 않고 지낼 수 있고 밤에 가로등이 없어도 마실 갔다 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동방예의지국으로 돌아가 인도의 간디가 알려주었던 아시아의 등불이 되었으면 좋겠다. 헉 너무 철학으로 가 버렸네. 다시 핸들을 돌려서 과거를 회상해 본다.     

 

  기억을 되살려보면 파리정탐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몽마르트르 언덕이다. 도착 전까지 나의 머릿속에서는 높은 언덕과 주변에 넓은 정원 그리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 거기에 양념치킨 소스처럼 다닥다닥 붙은 작은 성당 그들과 어우러져 있을 조각상 등 ~ 그런데 도착해 내려 본 그 유명한 명소는 참 초라하고 별 볼일이 없었다. 화가들이 옹기종기 앉아 초상화를 그려주는 모습은 초등학교 교문 앞 설탕물을 부어 모양내 주던 아저씨들의 모습과 흡사해 보였다. 내가 살던 고향의 붉은 언덕에 붕어빵 집이 유명했다. 국화빵의 문제가 아니라 빵집 딸아이의 미모에 빵 맛과 상관없이 매일 출근했던 적이 있다.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몽마르트르언덕이라는 유명세에 비하면 뭔가 허전했다.      

 

  그래 거리 두기는 이런 거야 상상 속의 추억들이 바로 앞에 펼쳐진 전경보다 훨씬 아름다울 수 있고 가슴속에 간직할 소중함으로 남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첫사랑의 아름다움도 추억이기에 그런 게 아닐까? 이루어질 수 없고 이룰 엄두가 나지 않아서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것이다. 아마도 다시 만나지 못할 먼 거리에 있기에 더욱 소중하게 간직하고픈 걸 것이다. 우리의 감정과 의견들도 그렇게 위치를 바꾸어 약간의 거리에 두고 생각해 보면 협치 할 수 있고 다가갈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디지털시대에 익숙해진 우리다. 즉시 댓글이 없으면 나를 무시하거나 말이 씹혔다고 인상을 쓰기 전 기다림 속에 펼쳐질 소중함을 생각하는 여유를 갖자. 거리 두기를 시간으로 느껴봄으로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경험을 가져보자. 그리고 열매의 단맛을 느끼고 거리 두기를 한 보람 속 열매의 소중함도 간직해 보자. 아마도 지금보다는 여유롭고 소통하는 나를 발견하지 않을까? 나이를 먹으면서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간다는 노사연 노래 가사처럼 세월의 흐름도 소중한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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