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기 바람이 싫어진 이유

짝사랑을 해 본 적이 있나요?

by oksusu mi

매미 소리가 시끄럽게 교실 안을 메우던, 유난히 더웠던 그 해 여름에 네가 가장 예뻤다고 감히 얘기해 본다. 초여름, 창문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짧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더듬는, 마음이 간지러워지는 그 풍경은 내가 간직한 기억들 중에서도 가장 예쁘다. 시험 기간에 수업보다 네가 더 눈에 들어오던 참 철없던 여름이었다. 너의 뒷자리에 앉아 정리하지 않은 과학 필기보다 정돈되지 않은 너의 교복 셔츠의 칼라에 신경 쓰고 있던 것이 기억난다. 징그러울 정도로 푸르렀던 가로수들 사이로 각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별로 웃기지도 않은 대화에도 피식거렸던 우리는 앞에 올 그 어떤 여름보다도 가장 예쁠 것이라고 감히, 감히 얘기해 본다. 무더웠지만 잠깐잠깐 불어오는 바람에 이런 내 묘한 감정이 물들어서 네게 전해질까 봐 나도 모르게 흠칫했던 적도 많았다. 한 줌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네가 너무 가까워서 행복했지만, 그 이상 가까이 가보지 못하는 상황이 너무하다고 느껴졌다. 그럴 때면 차라리 바람이 세게 불어와서, 붙잡아 두었던 마음이 그냥 쏟아져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학교가 끝나면 늘 우리 집으로 갔다. 엄마는 수박을 깎아주셨고 너는 익숙한 듯 받아 들고 내 방에 있는 선풍기 앞에 털썩 앉아 더위를 식혔다. 너를 거쳐 나에게 온 선풍기 바람은 왜인지 더 산뜻하다고 느껴졌다. 선풍기 앞에 아이처럼 입을 반쯤 벌리고 멍을 때리는 너를 뒤에서 바라보며 이런 일상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수박을 먹는 것, 공부를 하는 것, 게임을 하는 것, 핸드폰을 보는 것, 피아노를 치는 것 등, 평범한 일상에 네가 있고, 네가 있는 상황을 내가 앞으로도 일상이라고 부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교실에서 낮잠을 잘 때, 네가 매점에 같이 가자고 툭툭 쳐서 깨우고, 책을 안 가져오면 그것을 핑계 삼아 너의 옆자리에 앉고, 성적이 떨어져서 울고 있으면 민망해하면서도 등을 토닥여 주고, 혼자 복도를 걷다가 올려다본 시선 끝에 우연히 네가 들어오고,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이름을 부르면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는 너를 보고 씩 웃는 일상이 변치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단연코 확신하는 믿음조차 내 일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시간이 흘러 우리가 어른이 되면, 네가 기억하는 가장 예뻤던 여름이 그 해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여름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내가 생각나면 좋겠다고.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바람이 거세게 불어올 때면 나는 그런 바람들을 하나씩 쌓아갔다. 언젠가는 무너질 바람들이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그래서, 나는 선풍기를 쐬고 있는 너의 옆에 앉아, 강물에 물감을 풀듯, 아주 조용하게 내 바람들을 흘려보냈다. 선풍기 바람에 마저 흔들리는 마음을, 미약하게, 무관심한 너에겐 먼지만 한 존재감도 없을 만큼만, 정말 그 정도만 흘려보냈다.


그 해 여름이 가장 예뻤던 것은 내가 좋아하는 네가 가장 예뻤던 해라서. 그리고 너를 좋아하는 내가 가장 순수하고 고운 감정들을 꼼짝없이 가지고 있었던 해라서 그런가 보다. 그리고 또, 좋아하는 네가 나와 같은 감정을 품었던 해라서.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쭈뼛쭈뼛 서툰 사랑을 한 해라서. 너 또한 한 여름의 무더위 속에도 바람을 두려워하게 한 해라서. 너도, 무너질 듯한 바람들을 선풍기 바람에 적어 흘려보냈던 해라서.

바람은 가장 빛나는 너를 거쳐 가장 예쁜 여름을 맞이한 또 다른 아이에게로 물들었다.


선풍기 바람이 싫어졌던 그 해 여름, 네가 가장 예뻤다고 감히 얘기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