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망가뜨린 관계
초등학교 입학 날, 아직 엄마 아빠의 손바닥에 내 손이 가려졌었던 때, 나의 첫 번째 사회로 들어서던 그날, 우리가 만났다. 부딪힐 때마다 달그락달그락 거리는 방울 머리끈으로 엄마가 묶어주신, 양갈래로 귀엽게 묶인 내 머리는, 이마가 당길 만큼 높고 단단히 묶여 있었다. 그런 불편함도 모를 만큼 마냥 신나게 그 작은 왕국으로 발을 들이던 순간이 아직 기억에 남는다.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떨림과 긴장감을 안고 너무나 넓었던 학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몇몇 아이들은 나와 같이 신이 나 있었다. 등에 부딪히는 가벼운 책가방의 진동을 느끼며 폴짝폴짝 뛰어갔다. 반대로 몇몇은 고개를 엄마 등에 푹- 누른 채 자신의 숨소리를 듣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7년 전, 저마다의 시간, 저마다의 달에, 따듯한 어머니의 자궁을 박차고 나와 처음으로 차가운 공기를 맞이한, 꼬물거리던 아기들이, 그 작던 아기들이, 절대 클 것 같지 않던 아기들이, 모르는 새에 커서 이젠 익숙하게 "엄마! 아빠!"를 부르며 첫 세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비록 새 가방은 아닐지라도 처음으로 책이라는 것을 넣은 가방을 신나게 들쳐 매고 강당으로 들어갔다. 강당은 학부모와 아이들이 뒤섞여 어지러웠다. 벌써 인사를 나누는 아이들과 그들로 인해 서로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는 부모님이 보였다. 잠시 후 선생님들은 강당 무대 바로 아래에 반이 쓰인 표지판 앞에 서계셨고, 교감 선생님은 음성이 불안정한 마이크로 "학부모님들께서는 자녀가 지정된 학급이 쓰인 표지판 앞에 줄을 세워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연신 안내를 해주셨다. 두리번두리번 거리던 내 손을 이끌고 우리 아빠는 나를 부지런히 1학년 1반 표지판 앞으로 데려다 놓으셨다. 짧은 다리로 열심히 아빠를 따라가니, 아직도 그 얼굴이 선명한, 담임 선생님이 보였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 아빠에게서 나를 데려가, 이미 꽤 길어진 줄 맨 뒤에 나를 세웠다. 나는 강당 뒤로 사라져 가는 아빠의 뒷모습을 불안한 듯 보다가 무대 위 교감 선생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후에는 교감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의 지루한 안내와 설명이 있었다. 솔직히 그런 것에는 관심이 조금도 없었지만 그래도 무언가 내가 조금은 어른스러워진 것만 같은 느낌에 집중하는 척, 알아듣는 척 괜히 고개를 끄떡였다. 입학식이 끝나고 아이들은 부모의 손을 잠시 떠나 각자의 반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를 찾느라, 부모들은 그런 아이를 찍느라, 선생님들은 그런 혼란 속에서도 아이들을 학급으로 안내하느라 모두가 정신이 없었다.
교실에 도착하자 놀랍게도 아이들은 조용히 배정된 자리에 앉아있었다. 나는 발끝이 겨우 닿는 의자 위에 걸터앉아 허공에 다리를 차면서 주변을 살폈다.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지만 눈에 들어오는 여자 아이가 한 명 있었다. 하얗고 보송한 얼굴에 젖살이 올라 봉긋한 뺨과, 그런 두 뺨에는 홍조가 옅게 올라와 사랑스러웠다. 머리는 한 갈래로 깔끔하게 묶여 있었고, 나풀거리는 부직포 재질의 분홍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나와 비슷한 구슬 머리끈에 햇빛이 부딪히며 반짝거렸다. 그 애는 나와 같이 허공에 가벼운 발길질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을 딱- 마주쳐 버렸다. 그 순간부터 우리의 인연이 시작됐다. 입학식이 끝나고 학교 운동장에 쭈그려 앉아 모래성을 쌓고 있던 나에게 그 애가 다가와 "이렇게 하면 더 잘 뭉쳐!" 하며 손을 포개던 그날, 그 순간부터 우리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1학년, 2학년, 3학년, 4학년. 그렇게 우리는 한 살, 한 살 차곡히 아직은 얇은 세월을 쌓아갔다. 숫자를 배웠고, 한글을 배웠고, 덧셈과 뺄셈을 거쳐 구구단을 배웠다. 또 계절들을 배웠고, 동요를 배웠고, 피아노를 배웠고, 분수를 배웠고, 시계와 시간을 배웠다. 그렇게 하나씩 우리는 세상의 기틀을 배웠다. 그러면서 자연히 시간이 지나감을 느꼈고, 앞으로 우리에게 유턴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애는 예쁘장한 얼굴만큼 고집이 있는 아이였다. 자신을 아낄 줄 아는 똑 부러지는 강단이 있는 아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 아이를 따라 하는 애들이 더러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그 애는 불쾌해하면서도 내심 뿌듯해 보였다. 그런 모습이 나는 부러웠다. 그 애가 나보다 어려운 덧셈 문제를 푸는 것이, 나보다 예쁜 필통과 연필, 지우개 그리고 그것들로 나보다 예쁜 글씨를 쓰는 게 부러웠다. 시샘이 아니라 그냥 순수한 동경심이었던 것 같다. 우와-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는 늘 그 애가 하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내가 그렇게 감탄하면 그 애는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그런 모습이 좋았다. 그때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빛나게 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언젠가 엄마가 내가 그때 쓴 시를 보여줬다. 거기에는 "연꽃을 받치고 있는 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적혀 있었다. 아마 그걸 이쯤에 쓴 것 같다. 나는 너의 당돌함을 좋아했고, 너는 나의 동경심을 좋아했다.
우리는 평소에는 평생의 짝꿍을 만난 것 같았다. 심지어 같은 아파트 단지에, 같은 동에, 그것도 한층 차이로 살았기 때문에 얼굴을 보지 않는 날이 없었다. 같은 것을 좋아하고 상상하고 그렸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애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 애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힘의 차이가, 불연 듯 느껴지는 불평등함이 바늘처럼 배를 찔러댔다. 자잘한 갈등에서 얇은 바늘처럼 찔러대던 자극은, 점차 흉측한 짐승의 부리가 되었다. 나의 동경심에 구더기가 생겼다. 그것은 나의 동경심을 갉아먹고 스스로를 살 찌웠다. 그러고는 다른 구더기를 낳았다. 둥글던 순수함은 그것들이 갉아먹은 모양대로 울퉁불퉁 모난, 못생긴 것으로 변했다. 사랑해서 동경한, 동경해서 사랑한 우정이었다. 이젠 시샘뿐인 사랑만이 섞어버린 사과처럼 남아있다. 다툼에서 내가 사과하는 빈도와, 그 애한테 양보하는 횟수가 늘었고, 그 애의 눈치를 보는 날들이 잦아졌다. 그 애가 나를 당길수록 더 밀어내고 싶어졌다. 그러다 내가 시골로 이사를 갔던 날엔 알 수 없는 후련함과 동시에 찝찝함이 남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어서 자주 연락도 하고 놀기도 했지만 나는 그 애가 보고 싶다는 감정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일종의 해방감 같은 것도 느껴졌다. 그렇다고 그 애가 나빴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관계가 어딘가 좀 고장 나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한국을 벗어나 외국으로 잠시 떠났다. 그 몇 년 동안, 우리는 1년에 몇 번 간신히 문자로 서로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됐다. 그 잠깐 몇 년 동안, 내가 그 아이를 생각하지 않은 그 짧은 몇 년 동안, 정말 많은 것들이 변했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 애는 더 마르고 더 예뻐져 있었다. 하얗고 뽀얀, 머리는 똑 단발을 한 어여쁜 여중생이 되어있었다. 내 십년지기를 만난 그날, 다시 익숙한 바늘이 배에, 그리고 또 가슴에 날카롭게 꽂혔다. 쓸린 상처 위에 소독약을 바른 듯 따끔거렸다. 거기에 바늘이 박혔다. 피가 맺히고, 다시 박혔다. 그렇게 버틴 우정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우리 우정은, 내가 잊어버린 너의 생일을 기점으로 허무하게 무너졌다.
나는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차라리 내 잘못으로 끝내고 싶었던 것 같다. 이 불편한 관계를 이어갈 힘도, 의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 잘못된 방법으로라도 그 애의 삶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 애도 사과하지 않는 나를 마지막까지 붙잡지 않았다. 결국 내가 포기하면 끝나버릴 관계였던 것이었다.
이런 관계도 있는 거겠지. 당연하게 느껴졌던 사람에게서 벗어나야만 하는 관계. 서로가 포기해야 편해지는 관계. 벗어나야만 내가 보이는 관계.
벗어난 관계의 허물에 1학년 교실 속 우리가 남아있다. 나는 그때의 우리마저 버렸고, 그제서야 온전한 우리가 보인다.
이런 관계도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