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어 지지 않는 기억
요즘, 유난히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한 때는 그 사람과의 인연이 평생일 줄만 알았다.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날들이 당연하던 시절이 있었다. 같은 집에 들어가, 같은 밥상에 앉아, 서로가 좋아하는 반찬이 달라도 같은 나물과 국, 그리고 밥을 먹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던 옛날이 있었다. 밥상 아래로 꼬물거리는 발을 포개어 온도를 나누며 하루 종일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했다. 서로 앞에 서면, 티끌이 되던 하루의 무게를, 등을 쓰다듬으며 가볍게 털어줬었다. 가벼워진 서로의 등에 기대어, 노래를 듣고, 티비를 보고, 가장 밋밋한 얼굴을 서로 사랑스럽게 쓰다듬었었다. 그 사람의 무릎을 베면 들리던 그의 희미한 흥얼거림에 귀를 기울이다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에 드는 것이 우리가 하루를 떠나보내는 방법이었다. 지나친 하루 뒤에 기어코 찾아오는 또 하나의 새벽과 이어지는 아침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의 무릎 아래로 피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면, 늘 같은 꿈을 꿨다.
꿈속에서 나는 한 기차가 떠나가는 풍경을 지겹도록 바라봤다. 기차 속에 앉아있을 그 사람을 찾으며 고개를 이리저리 비쭉 내밀었다. 그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늘 기차를 향해 팔을 쭉 뻗어 손을 흔들어줬다. 어디선가 그가 나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혹여나 인사하지 않는 내 모습을 보고, 서운해할까 걱정됐었다. 기차는 끼익- 뾰족한 마찰음과 함께, 그의 심장박동에 맞춰 출발했다. 기차의 머리가 멀어지고, 꼬리가 가까워졌다 그마저도 멀어지면, 나는 그제야 저려오는 팔을 내렸다. 기차가 사라진 기차역에는 아무것도,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 낡지 않은 기차역이었는데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기차소리가 닿지 않으면, 아직 귀에 낮게 웅- 웅- 거리는 둔탁한 리듬을 손가락으로 허벅지에 튕겨댔다. 운율에 맞춰 피아노 곡을 떠올려보기도 했고, 어디서 들어본 듯 익숙한 가요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매끈하게 코딩된 기차역 바닥에 발을 구르면서 보기 민망한 막춤도 췄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떠나간 기차가 떠오르지 않을 때까지 그곳에 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가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잊혀가는 리듬을 겨울나무에 매달리는 눈송이처럼, 하염없이 손으로 발으로 튕겼다. 꿈에서 깰 때까지, 나는 혼자 남겨진 그 기차역을 떠나지 못했다.
꿈에서 깨면 나는 가만히 베고 있는 무릎을 지긋이 내 얼굴의 무게로 꾹- 눌러봤다. 꿈속에서 멀어졌던 그 리듬을 다시는 잊지 않겠다는 다짐 아닌 다짐을 하며. 익숙한 템포를 손가락으로 이번에 그의 허벅지 위로 튕기며 그 기차역을 떠올렸다. 머리를 돌려 올려다본 그 사람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곤히 자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워 그의 피곤한 얼굴을 쓰다듬었다. 어두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이마, 그 아래 말끔히 정돈된 눈썹, 편히 감은 두 눈, 끝이 살짝 올라간 코와 옅은 분홍색을 띠는 입술. 매일 본 얼굴을 손으로 더듬거리며, 내 뇌 속에 그것을 조각하듯, 그가 흥얼거리던 노래를 속삭였다. 호수 깊숙이 잠수를 하듯이, 들리는 건 그 사람과 나의 숨소리와 심장소리 밖에 없었던, 꿈같은 새벽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회상의 결말을 도돌이표처럼 그날에 갇힌다. 그날 아침을, 낮을, 밤을 그리고 새벽을, 그 새벽을 기억한다.
수 백번쯤 지나다닌 길 위에 어둠만 깔렸다. 풀벌레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새벽이었다. 장례식에 돌아오던 그날. 나에게 나 밖에 없었던 날이었다. 수천번쯤, 수만 번쯤 지나온 길이 낯설었다. 옆에 그 사람이 같이 걷는 환영을 봤다. 나를 보면서 초롱거리던 눈으로 미래에 대해 매일 떠들었던 오늘과 똑같은 새벽들을 봤다. 마지막으로 내 손을 잡으면서 밤에 조심히 다니라고 말했던 원망스러운 입을 봤다. 수명을 다해가는 듯, 곧 죽을 듯 깜빡이는 가로수 하나 앞에서 가만히 그것의 죽음까지도 슬퍼했던 날이었다. 풀벌레 소리보다 내 흐느낌이 더 크게 들렸던 그날 새벽이었다. 그날 나는 그와 함께 죽었다.
꿈속의 기차역에서 눈을 떴다. 기차 창 안으로 나에게 손을 흔드는 그가 보였다. 나는 평소처럼 떠나가는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들 수 없었다. 둥- 두둥- 일정한 박자로 떠나가는 기차소리에 맞춰 손가락을 튕겼다. 머릿속에 조각한 그는 눈을 뜨지 않고, 흥얼거리지 않는다. 아직 나는 잊혀버린 리듬과 잠든 조각상과 함께 기차역에 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