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소녀 오디세이

2화 달빛 지붕의 고양이. #/ 연재소설 / 성장소설 / 가족 /

by Ssan카르트

1980년 6월 초,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친 세화는 친구 집으로 향했다.


담장 너머 사직동 언덕의 바람을 불러 모으듯, 세화의 친구 희경이네 집은 지세를 듬직하게 누르며 앉아 있었다.

햇살 머금은 기와지붕이 비단 자락처럼 매끄럽고 중후한데, 본채를 축으로 좌우로 뻗어 나간 방들과 부엌은 단순히 지어 올린 집이라기보다,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이들이 어깨를 맞대고 웅성웅성 모여 사는 작은 마을 같았다.

서로에게 등을 기대고, 낮은 처마와 높은 문지방이 한데 어우러진 그 짜임새에는 질서가 깃들어 있었다.


희경이 엄마는 방마다 세입자를 들였다. 마당에 서 있으면 본채에서 텔레비전 소리와 시골에서 올라온 대학생 형제가 틀어 놓은 라디오 소리, 문간방 젊은 부부의 도란거림이 뒤섞여 묘한 화음을 이루곤 했다.


마당 한쪽 담벼락 아래에는 돌로 둥글게 둘러싸인 우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러 세입자가 복닥거리며 살다 보니 수압이 툭하면 제멋대로라 쇳소리만 섞인 공기만 새어 나올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우물은 마르지 않는 든든한 수원이 되어 주었다.

특히나 동네 전체에 단수가 들이닥치는 날이면, 희경이네 마당은 그야말로 진풍경이 펼쳐졌다. 집집마다 손에 들린 양동이와 대야들이 우물가로 뱀처럼 줄을 길게 이어 늘어섰고, 도르래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물을 긷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뒤섞여 마당은 일순간 삶의 활기로 넘실거렸다.

이웃들은 우물가를 제 집 앞마당처럼 스스럼없이 드나들었다.

낡은 두레박이 어둠 속으로 떨어져 '툭' 하고 수면을 깨뜨릴 때마다, 길어 올려진 물은 맑고도 차가운 생명줄이 되어 쉼 없이 마당 한복판을 적셨다.


그곳에서 맑은 물이 쉼 없이 샘솟아 오르듯, 이 집 안주인의 마음 또한 너그러웠다.


부동산 열풍이 온 나라를 휘몰아치던 시절, 희경의 엄마는 주말마다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남겨진 희경의 어깨 위로는 집안 살림과 동생들을 보살피는 임무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희경에게는 지루하고 고단한 일이었지만, 세화가 곁에 있으면 달랐다.

빗자루질이나 빨래를 널 때, 둘이 눈을 맞추고 미소를 나누면 말라 있던 생의 기운이 샘물처럼 차올랐다.

혼자라면 버거웠을 시간이, 둘이 함께여서 견딜 만한 삶의 한 장면이 되었다.


“점심으로 카레라이스 할까?”

희경이 묻자 세화가 웃으며 되물었다.

“재료는?”

희경이 감자와 당근을 꺼내 씻어 도마 위에 올렸다.

세화는 동생들이 먹기 좋게 야채를 잘게 썰어 냄비에 기름을 두르고 볶기 시작했다.

물을 붓고 끓이다가 카레 가루를 풀어 넣었다.

노란빛이 천천히 퍼지며 냄비 안에서 부드럽게 돌았다.

이내 카레 특유의 향기가 부엌을 넘어 마당까지 번져 나갔다.

카레라이스로 점심을 먹은 뒤, 세화와 희경은 가정과목 실습 때, 배운 타래과와 꽈배기를 만들었다.

밀가루 반죽에 칼집을 넣어 매작과 모양으로 꼬고, 기름에 넣자 반죽이 금세 노릇하게 부풀어 올랐다.

갓 건져 올린 과자 위에 걸쭉한 설탕 시럽을 바르고 깨를 듬뿍 뿌리던 순간, 달콤한 냄새가 집 안 가득 퍼졌다.

그 냄새 속에서 세화는 잠시 아무 걱정도 떠올리지 않았다.

친구 집 텔레비전 화면 속 세상에 넋을 빼앗긴 사이, 밤은 소리 없이 깊어졌다. 세화는 그 적막을 지우려는 듯 일부러 더 분주히 몸을 놀렸다.

우물에서 찬물을 길어 올리고, 칭얼대는 친구의 남동생들을 씻기고, 어질러진 방구석을 야무지게 쓸고 닦았다.

늦은 저녁, 희경의 어머니가 현관을 들어섰다.

말끔히 정리된 방을 둘러보던 그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 웃음은 세화가 제집에서는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따뜻하고도 투명한 칭찬이었다.


“세화가 다녀가면 집안이 아주 환해지네. 우리 딸이랑 늘 붙어 있으면 좋겠다.”

희경 엄마의 다정한 말 한마디가 마당 가득 차올랐다.

그 눈빛 뒤에 든든한 조력자를 얻은 안심과, 앞으로도 세화가 이 집 일을 거들어주길 바라는 기대가 숨어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내심 씁쓸하고 묘한 기분이 일었지만, 한편으로는 이곳을 마음 놓고 드나들어도 좋다는 허가증을 받은 것 같아 발끝에 실린 무게가 한결 가벼워졌다.


친구 집을 나서 차가운 밤공기가 뺨을 스칠 때면, 세화의 가슴은 거짓말처럼 다시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희경네 집의 온기가 흩어지기도 전에 밤 열 시를 훌쩍 넘긴 시각, 세화가 집 앞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육중한 나무 대문이 굳게 빗장을 걸어 잠근 뒤였다.

대문 앞에 선 세화의 그림자가 가로등 불빛 아래 위태롭게 길어졌다.

집 안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그 침묵은 대문 너머로 서늘한 압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소녀는 차마 벨을 누르지 못하고, 굳게 닫힌 문틈 사이로 제 숨소리만을 가만히 밀어 넣을 뿐이었다.


“문 좀 열어주세요.”


그 한마디가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대신 세화는 굳게 닫힌 나무 대문에 가만히 이마를 기댔다.

차가운 나무의 질감이 살갗에 닿자, 제 안의 다급한 온기마저 서늘하게 식어갔다.

그것은 단순히 닫힌 문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단단히 걸어 잠근 비장한 거절 같았다.


세화는 연탄재가 수북이 쌓인 콘크리트 쓰레기통을 딛고 담을 넘어, 도둑고양이처럼 기와지붕 위를 타고 올라갔다.

지붕으로 올라서자 달빛이 밝게 흘러 마당의 눅눅한 초여름 밤공기를 낮게 가라앉혔다.


지붕을 넘어 장독대 사이를 지나갈 무렵, 안방 쪽에서 가느다란 불빛 하나가 흘러나와 마당 한복판을 밝히며 길을 막았다.

“누구냐!”


어둠을 가르며 날카로운 호통이 터졌다.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게냐? 벌써 이게 도대체 몇 번째냐… 니 형제들은 안 그러는데, 너는 어찌 이러느냐!”

마당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아버지였다.


당황한 세화는 그 소리에 놀라 발을 헛디뎌 벽에 이마를 세게 부딪쳤다.


그런 세화를 본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붉어지고 숨결이 거칠게 떨렸다.


아버지가 집어 든 묵직한 유리 재떨이가 탁자에 부딪히며 둔하게 울렸다. 허리춤에서는 가죽 벨트를 풀어 휘두르려는 손길이 보였다.

평소에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던 아버지였다.

그래서 그 모습은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그날 세화를 가장 괴롭힌 것은 아버지의 폭력 그 자체보다, 거실에서 흘러나오던 주말의 명화 시그널 음악이었다. 집 안에서는 그 음악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웅장하게 울리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는 빠삐용이 자유를 향해 몸을 던지는 탈출 장면이 흐르고 있었다.

언니와 동생들은 홀린 듯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마당에서 벌어진 뜻하지 않은 소동에, 형제들은 부랴부랴 텔레비전을 껐다.
겁에 질린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볼 뿐, 말리지도 다가오지도 못했다.

커다랗게 떠 있던 놀란 동공이 자꾸만 세화의 뇌리에 박혔다.


결국 어머니가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말리면서 상황은 겨우 가라앉았다.

그러나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아버지는 칼날 같은 말들을 쏟아냈다.


“겁 없이 밤에 돌아다니는 계집애들한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아느냐!”

“수사반장에서 나오는 각종 사건사고를 보고도 모르느냐?”


사춘기에 접어든 딸이 몹시 걱정스러웠던 아버지에게, 한밤중 담을 넘고 지붕을 타는 세화의 모습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며 또다시 외쳤다.


“다시 한번만 더 그러면 내가 너를 남산에 묻고 말 거다!”아버지가 방으로 들어가자,

어머니는 “얼른 씻고 자거라” 한마디만 남기고, 아버지 마음을 진정시키려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도 반복되는 세화의 행실에 지쳐버린 걸까.
왜 그녀를 한 번도 따뜻하게 감싸주지 않는 걸까.


부모에게 세화의 일상은 그저 매듭 없이 풀려 나가는 실타래였을 뿐, 그 엉킨 실 끝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추적할 의지는 없었다.

그저 결과만 보고 나무랐을 뿐이었다.

십 년이라는 시간은 그렇게 서로를 갉아먹는, 끝없는 고통과 침묵의 기록이었다.

부모의 시건은 훈계라는 이름의 꾸중일 뿐, 그 안에 온기라는 굴절은 단 한 조각도 섞여 있지 않았다.

다른 자식에 대한 그 애틋함의 지분이 단 몇 퍼센트만 존재했다면, 세화의 내면은 이토록 황량한 무채색으로 퇴적되지는 않았으리라.

결국, 그들에게 세화는 자식이라기보다 자신들의 세계를 지탱하는 위태로운 ‘평판’의 일부였다.


밤의 어둠 속에서 지붕을 타는 딸을 발견했을 때, 그들이 느낀 공포는 아이의 안전이 아닌, 무너질 자신의 체면과 이웃의 시선이라는 허망한 댐을 향한 것이었다.


마치 수사반장의 필름처럼 돌아가는 동네의 시선 속에서, 세화는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체면과 사회적 안위를 증명해야 하는 존재였다.


세화는 마루 아래 디딤돌 옆 좁은 틈에 웅크리고 앉아 소리 없이 울며 생각했다.


핏덩이 때부터 친할머니 댁에서 자라다 네댓 살 무렵, 외갓집에서 어머니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거칠게 마감된 시멘트 바닥의 음습한 목욕탕에서 어머니는 어린 세화를 씻기고 있었다.

그때 미끄러운 비눗물 사이로 어머니의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져 세화의 작은 어깨를 적셨다.

세화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온기는, 어쩌면 그 뜨거운 눈물뿐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온기의 기억조차 희미해진 지금, 그날 토요일의 공기는 얼음장보다 차가웠다.

그 소란이 지나간 뒤, 밤은 칠흑처럼 어둡고 고요했다.

세화는 이불속에서 숨을 죽인 채 다시 한번 소리 없이 흐느껴 울었다.

가장 포근해야 할 이불 속이었지만, 세화에게는 지푸라기 하나 붙잡을 수 없는 삭막한 들녘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 집에서 세화는 단 한 번이라도 ‘가족’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기분에 따라 무시해도 되는 존재. 형제들이 당연하다는 듯 온갖 심부름을 시키는 대상. 지친 어머니가 일상의 짜증과 화풀이를 쏟아낼 수 있는 가장 만만한 과녁.

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편에서는 유쾌하고 다정한 대화가 오갔지만, 이편의 세화는 그 풍경에 결코 섞일 수 없는 고독한 이방인이었다.


돌이켜 보건대, 그 모든 풍파의 시초는 그 무렵부터였다.

세화는 할머니의 따스한 손을 놓고 서울로 오기 위해아버지를 따라 나서, 새로운 가족과 한 집에서 살기 시작한 시린 정월의 어느 날부터였다.

세화는 자유롭고 밝던 시골 시절과 달리 냉랭한 집안 분위기와 낯선 형제들의 은근한 멸시를 마주했다.

어머니는 난처한 눈빛으로 봇짐을 훑고,

"동생이고 누이니 다들 친하게 지내거라."라는 말을 남기고 ,

아버지는 무심히 신문 속으로 얼굴을 묻었다.

할머니가 싸준 낡은 보따리 속 고향의 숨결마저, 견고한 가족 구조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 갔던 그 무렵부터...


새로운 집에 적응하지 못하고 슬픔에 젖어 있던 7살의 세화는 집을 빠져나와 숨 쉬듯 걷고 또 걸었다.

어디에도 마음을 둘 곳 없는 소녀의 적막한 심정은 사직동 육교 아래를 흐르던 자동차 불빛 사이로 말없이 스며들었다.

저 달리는 차를 타면, 그립고 또 그리운 할머니께로 갈 수 있을까?

그러나 자동차 불빛은 닿을 수 없는 하늘의 별과 같았다.

불가항력의 절망 속에서 찾아온

선택적 함구증은,

어쩌면 그 공허와 공포가 목구멍에 엉겨 붙어 만들어낸 단단한 옹이였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가정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채 입을 닫아버린 세화의 침묵이 깊어질수록, 어머니의 핍박은 날 선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그녀 마음 밑바닥에 앙금처럼 가라앉은 것은, 딸만 셋을 연달아 낳았다는 해묵은 부채감이었다.

그것은 점쟁이의 예언이 적중했다는 뒤틀린 자격지심으로 이어져, 애먼 세화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새겼다.


마침내 그토록 염원하던 아들이 연달아 태어나 집 대문에 빨간 고추와 숯덩이가 매달린 금줄이 걸리던 날, 집안을 가득 채운 환희는 세화에게 도리어 서늘한 소외의 시작이었다.

삼신상 위 기름진 미역국과 흰쌀밥의 온기는 오로지 갓 태어난 남동생에게만 향했다. 세화는 축제의 불빛 아래 그림자처럼 지워져 가며, 어머니가 투사하는 해소되지 못한 업보를 온전히 감내해야만 했다.


어머니의 무차별적인 냉대는 곧 집안의 공기가 되었다.

철없던 형제들은 그 기류를 눈치로 배우듯 익혀, 세화를 함부로 대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흉내 냈다.

그렇게 집안의 말과 시선은 아이 하나를 조용히 가장자리로 밀어냈다.

세화는 어느새 가족의 기분과 안색을 먼저 살피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그때부터 이 집은 세화에게 단 한 뼘도 마음 둘 곳 없는 공간이 되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는 무렵이었다. 형제들은 출출함이 밀려오고 간식이 생각나고 텔레비전에서 연속극이 시작되면, 심부름은 늘 말없이 앉아 있는 세화의 몫이었다.

“세화야, 라면땅이랑 인디언밥 좀 사 와.”

동생들은 세화를 ‘누나’라 부르지 않았다. 늘 이름을 불렀다.

하기 싫다는 말 한마디, 무섭다는 눈빛 한 번 내비치지 못한 채 세화는 쫓기듯 대문을 나섰다.


대문 밖은 집안과는 다른 종류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가로등조차 없는 작은 골목에는 어둠이 덩어리째 고여 있었다.

집과 담장 너머에서 길고양이가 날카로운 울음을 지를 때마다, 세화의 작은 어깨는 굳어졌다.

골목 끝 ‘행복상회’까지 가는 길은 어린 소녀에게 아득한 싸움터였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한 서늘한 어둠 속에서, 세화는 매일 반복되는 무력감을 뼈저리게 느꼈다.


정말 무서웠다. 당장이라도 뒤돌아 집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세화는 멈출 수 없었다.

무서운 골목보다 더 무서운 것은, 심부름을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갔을 때 마주할 형제들의 핀잔과,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다시 어둠 속으로 떠밀 집안의 공기였다.

세화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과자 봉지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돌아오는 길, 멀리서 보이는 대문의 불빛은 구원이 아니라 또 다른 구속의 시작이었다.

집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세화는 골목에서 겪은 공포를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다시 침묵 속에 가두었다.

거절할 줄 모르는 아이, 군말 없이 심부름을 해내는 착한 아이라는 굴레는 그렇게 밤마다 세화의 영혼을 갉아먹으며 단단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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