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티시모와의 교실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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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화가 걷는 안국동의 길은 밤새 내려앉은 이슬에 젖어 있었다. 경복궁 돌담의 오래된 화강암 틈마다 물기가 스며들어, 돌빛은 새벽빛을 머금은 듯 검푸른 빛을 띠었다.
초록색 시내버스가 매캐한 매연을 남기며 지나가자 공기가 잠시 탁해졌다.
이른 아침부터 길모퉁이 ‘풍년 상회’ 앞에는 아주머니들이 모여 연탄재를 잘게 부수어 거친 질감으로 양은 냄비를 윤기 나게 닦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얼굴의 가시지 않은 멍이 부끄러워 세화는 줄곧 발끝만 보며 겄다가, 갈라진 보도블록 사이 메마른 틈을 비집고 올라온 하얀색 꽃잎을 보았다.
그 가녀린 꽃잎은 서러운 듯 눈부셨다. 척박한 대지의 침묵을 깨고 기어이 고개를 든 작은 생애가, 6월의 햇살 아래 수줍으면서도 단단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밟히지 않을 푹신한 흙이 있는 화단에서 자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그 생각을 하다 문득 자신의 멍든 뺨을 만졌다.
교문으로 이어진 길은 여학생들의 하얀 상의로 가득했다. 멀리서 보면 그 풍경은 마치 배꽃이 한꺼번에 피어난 배밭 같았다. 아침 햇살을 받은 흰 셔츠들이 바람에 살짝 흔들릴 때마다, 길 위에는 조용한 하얀 물결이 번져 갔다. 웃음과 발걸음이 뒤섞인 그 물결이 천천히 교문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운동장 가장자리 담장 옆으로 미루나무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위로 6월의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아직 눅눅해지지 않은 따뜻한 바람이 교정을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어느새 담쟁이덩굴은 건물 창틀 아래까지 기어올라 연한 초록빛으로 반짝였고, 운동장 가에 핀 장미들은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민 채 분홍빛 수줍음처럼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교실 문을 열자 60여 명이 토해내는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특히 토요일 아침의 공기는 일찍 끝난다는 해방감 탓인지 평소보다 더 소란스럽게 들떠 있었다.
“오늘 빨리 끝나면 어디 갈래?”
앞자리에서 몸을 뒤로 젖힌 아이가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가긴 어딜 가. 시험 코앞인데 공부해야지.”
“아이고, 난 큰일 났다. 하나도 못 봤어.”
책상 위에 펼쳐진 참고서를 넘기며 미연이가 말했다.
“너 맨날 그러면서 또 점수 잘 나오잖아.”
“무슨 소리야. 이번엔 진짜야.”
“에이, 일단 끝나고 떡볶이나 먹으러 가자.”
이렇게 토요일 아침 특유의 가벼운 소란이 교실 안을 잔잔하게 흔들고 있었다.
복도 바닥은 지난번 정성 들여 왁스칠을 했던 기억을 증명하듯, 짙은 고동색 위로 유난히 또렷한 번들거림을 머금고 있었다.
세화가 자리에 앉자 창가로 스며든 햇살이 하얀 교복 어깨 위에 조용히 내려앉아 금빛으로 번졌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시작될 중간고사를 앞둔 토요일, 수업은 연이은 자습으로 시작되었다. 그 시간만큼은 교실이 거대한 시험 대비 수용소처럼 변해 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연필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 잔잔히 흐르는 가운데, 학생들은 저마다 책상에 교과서와 낡은 참고서를 붙든 채 나름의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이 시험공부에 매달려 있을 때, 숙영과 그녀의 짝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만의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그녀들에게 노트필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시험에 나올 핵심 문장들을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담는 행위는, 그 정갈한 필체가 곧 완벽한 성적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강박적인 집착이었다.
자습이 시작되자 그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책상 서랍에서 작은 잉크병을 꺼냈다. 금속 펜촉을 끼운 펜대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병 입구에 살짝 담갔다 빼는 순간마다, 교실 곳곳에서 짧게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화의 앞자리에 앉은 숙영은 평소 수업 내용보다 종이 위에 새겨지는 글자의 각도에 더 집착했다. 그녀에게 노트는 지식의 저장고라기보다 정교하게 설계된 도안이었다. 잉크가 번지지 않도록 공책 아래에 종이를 받치는 손길은 경건하기까지 했으며, 실수로 점 하나만 번져도 공들인 페이지를 가차 없이 찢어버렸다. 그 정갈한 종이 위에서 푸른 얼룩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흠결이었다.
세화는 그 분주한 손길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숙영은 펜촉이 종이를 긁는 서걱거림 속에 자신을 가둔 채, 정작 선생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지식의 구조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숙영의 짝 또한 만만치 않았다. 유려한 필체만큼이나 날카로운 성미를 지닌 그녀는, 매끄러운 종이 위로 완벽한 획을 그어 내려가는 행위 그 자체에 몰두했다. 누구의 글씨가 더 정교하고 아름다운가를 두고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동안, 세화는 그 풍경 속에 섞이지 못한 채 투명하게 떠 있었다.
그때, 숙영이 거칠게 노트를 찢다 손끝으로 잉크병을 건드리고 말았다. 작은 병이 기울며 푸른 잉크가 쏟아졌고, 필기에 몰두해 있던 옆자리 짝의 소매를 순식간에 흥건히 적셨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비명을 지르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완벽하던 기록이 망가진 것에 대한 분노가 교실 안을 날카롭게 할퀴었다. 문제는 하나뿐인 하얀 춘추복 소매가 새파랗게 물들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황급히 세면대로 달려가 소매를 적셔 보았지만, 이미 섬유 깊숙이 스며든 안료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울상이 되어 돌아온 그녀에게, 세화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툭 던졌다.
"잉크 얼룩은 집에 가서 서울 우유로 지워봐."
세화의 시선은 여전히 무심했다.
“그렇지만 워낙 깊이 물들어서 예전의 그 하얀빛을 되찾기는 힘들 거야. 대신, 푸른 잉크를 물에 아주 살짝 타서 상의 전체를 하루 정도 담가봐. 전체를 푸르게 물들이는 거지.”
당황해하던 그녀가 멈칫하며 세화를 돌아보았다. 세화는 그녀의 소매 끝을 응시하며 덧붙였다.
“그 물에 담갔다가 말리면, 이전보다 훨씬 더 희게 보일 거야. 원래 푸른 기운이 살짝 돌 때, 사람 눈은 그걸 가장 깨끗한 흰색이라고 착각하거든.”
그녀는 세화의 말이 마치 어떤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눈을 가늘게 뜨며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란이 잦아들 무렵, 세화는 필통에서 펜대를 꺼내 쥐었다. 평소 모나미 볼펜 153으로 숙제검사만 겨우 면할 정도로 성의 없이 휘갈기던 그 손가락이 처음으로 펜촉에 힘을 실었다.
누런 갱지 상단에는 영어 필기체가 유려하게 자리 잡았다.
To Grandma, I miss the scent of your warm hands.........
날카로운 펜촉이 메마른 종이를 사각이며 긁어낼 때마다, 그것은 마치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죄송스러움으로 세화의 가슴 깊은 곳을 긁어내는 소리 같았다.
펜촉 끝에 위태롭게 매달렸던 잉크 한 방울이 종이에 스며들어 까맣게 번져갈 때, 그녀의 무심했던 세월도 그 검은 얼룩 속으로 함께 녹아내리고 있었다.
조모(祖母님), 무심(無心)했던.... 세화가 이제야....... 가만히 글자들을 응시하던 세화의 영롱한 눈가에,
아무도 모르게 묵직한 그리움이 이슬처럼 맺혔다.
세화에게 글자는 단순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종이라는 평면 위에 구현되는 완벽한 공간의 분할이었다. 자음과 모음 사이의 치밀한 간격, 획이 꺾이는 지점의 서늘한 각도, 그리고 종이의 여백이 주는 무게감까지. 세화는 마치 정밀한 설계도를 그리듯 무심하면서도 거침없이 펜을 놀렸다.
자습 시간 특유의 무거운 정적이 다시금 교실을 덮었다. 그러나 이번 고요함의 원인은 시험에 대한 압박감이 아니었다. 세화의 책상 주변으로 몰려든 그녀들의 경악 섞인 시선 때문이었다.
자타공인 학급 최고의 명필이라 자부하던 숙영과 그녀의 짝은 얼어붙은 채 세화의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들이 손가락 마디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연습하며 도달하려 했던 그 완벽한 서체가, 평소 글씨 한 번 제대로 쓰지 않던 세화의 손끝에서 너무도 쉽고 우아하게 완성되어 있었다.
필사적으로 매달려온 그녀들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세화가 써 내려간 문장들은 차가운 검은 잉크 속에서도 날카로운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세화는 가쁜 호흡을 가만히 가다듬었다. 펜촉을 타고 흘러나온 마지막 진심을 응시하던 그녀는, 천천히 노트를 덮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한 시절을 영원히 봉인하는 의식 같았다. 세화는 노트를 조심스레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한 정적이 교실을 훑고 지나간 뒤, 그 짧은 고요의 틈을 비집고 세화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잔혹한 소동이 시작되었다.
그 서막은 담임이 교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는 순간에서부터였다.
2주 전에 학교 부속 건물 공사비를 명목으로 육성회비를 평소보다 훨씬 앞당겨 납부하라는 공고가 내려왔다.
학급 납부 실적이 곧 자신의 유능함이라 믿었던 담임은 매일 종례 때, 아이들을 들볶으며 실적에 혈안이 되어 몰아붙였다.
세화는 늘 언니와 동생이 회비를 챙겨가는 날이면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부모님이 알아서 제 몫을 챙겨주곤 하셨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고 없이 앞당겨진 기한이 문제였다. 세화는 그 독촉 앞에서 차마 돈을 달라는 말을 입 밖으로 밀어내지 못한 채, 며칠을 가슴만 누르며 끙끙 앓았다.
종례 시간마다 교실 안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담임은 출석부 뒷장을 넘기며 미납자 확인을 반복했다. “아직 안 낸 사람, 손 들어.” 그 명령 아래, 하루가 다르게 손을 드는 아이들의 숫자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어제, 금요일엔 교실 안에 손을 든 아이가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된 순간— 세화는 끝내 그 ‘공개적인 망신’이 두려워 손을 들지 못했다.
세화는 남부러울 것 없는 중산층 가정의 자녀였다. 굳이 입을 열어 떼를 쓰지 않아도 비슷한 학년의 형제들이 필요한 것을 챙길 때면 부모님은 말 없는 딸을 위해, 늘 세화의 몫까지 나란히 챙기곤 하셨다. 형제들과 보조를 맞춰 준비된 단정한 옷차림은 세화를 늘 결핍 없는 아이로 보이게 했다. 반 아이들 역시 세화가 풍족한 집안의 아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게다가 몇 주 전, 아침부터 비가 몹시 퍼붓던 날이었다. 아버지는 남동생과 함께 기사가 딸린 차에 세화를 태워 등교시켰다. 번쩍이는 자동차 문을 열고 내리는 자신을 학급 친구 몇 명이 부러운 듯 쳐다보았고, 세화는 그 시선의 온도를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60여 명의 시선이 쏟아질 그 찰나의 정적이 두려워 세화는 끝내 손을 올리지 못했다. 제 번호가 불리지 않기만을 바라며 고개를 숙인 채 숨을 죽였다. 아이들의 손이 모두 내려간 것을 확인한 담임은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교실 문을 나섰다.
그러나 눈가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토요일 아침, 노란 서류철에 적힌 미납자 명단에서 끝내 지워지지 않은 ‘박세화’라는 석 자를 확인한 담임은 세 번째 시간, 자기 과목 수업과 자습 감독을 위해 교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섰다. 어제의 흡족했던 미소는 간데없고, 배신이라도 당한 듯 일그러진 얼굴로 교탁을 내리쳤다.
“박세화, 앞으로 나와!”
세화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교탁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운동장의 모래 먼지가 입안에 고이는 기분이었다. 담임은 마치 교활한 거짓말쟁이를 내려다보듯 경멸 어린 시선을 깔며 교탁을 돌아 나와 세화 앞에 섰다.
그는 성악을 전공한, 서른 하나의 젊고 유능한 음악 담당 선생이었다. 언제나 몸에 딱 맞는 슈트를 입고 은은한 스킨 향을 풍기며 그가 복도를 지날 때면 교실 안은 묘한 설렘으로 술렁였다. 나이에 비해 정신연령이 높고 감수성이 예민한 여학생들은 그를 향해 남몰래 깊은 가슴앓이를 하곤 했다. 반면 외향적인 성격의 소녀들은 그의 매력을 입에 올리며 복도가 떠나가라 호들갑을 떨거나, 자신의 마음을 공개적으로 떠벌리고 다니는 일도 예사였다.
“오늘도 진짜 멋있지 않냐?”
“웃을 때 봤어?” 몇몇 소녀들이 서로의 팔을 붙잡고 속닥거리다 못해 거의 외치듯 말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누군가는 괜히 교무실 쪽을 기웃거리며
“나 진짜 너무 멋있어서 죽을 것 같아.”
그 말과 함께 가슴을 움켜쥔 채 뒤로 휘청하며 기절하는 시늉을 하자, 옆에 있던 아이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와 장난스러운 비명들이 뒤섞여 복도는 한동안 작은 소동처럼 들썩였다.
그는 가난하고 삭막한 시대에서 유일하게 결이 다른 귀티를 지닌 존재였다.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가 위엄 있게 놓여 있는 음악실은 그만의 성소였다. 그의 우아한 발성과 절제된 매너는 아이들에게 단순한 선생님 이상의, 일종의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에게 학급은 자신이 지휘하는 결점 없는 오케스트라여야 했다. 하지만 세화의 거짓말은 그 매끄러운 악보 위에 떨어진 추한 얼룩이었다. 어제 교무실에서 유일하게 미납자 없는 학급으로 인정받아 은근히 마음속으로 으스댔던 자신을 단번에 묵사발로 만들어 오점을 남겨버렸다.
"학급 성적까지 갉아먹는 해충 같은 존재, 전교 꼴찌 박세화. '내 이것을 그냥...!'"
기한을 넘긴 육성회비 미납 사실을 재차 확인한 그의 눈빛은 평소의 지적인 광택 대신 차가운 멸시로 번뜩였다. 그의 가장 큰 분노는 어린 학생이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완벽했던 자신의 지휘가 보잘것없는 학생 한 명의 거짓말에 휘둘렸다는 모멸감이 그를 지배했다.
“박세화. 집에서 돈 안 주니? 아니면 네가 중간에서 슬쩍 써버린 거야?”
지난주에 다친 이마에 가시지 않은 멍자국이 남은 세화는 수치심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고개를 더 깊이 숙였지만, 담임의 시선은 송곳처럼 세화의 정수리를 찔렀다.
“어디서 감히 선생을 속여?”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그의 길고 곧은 손끝이 세화의 뺨을 휘갈겼다. 평소 건반 위를 부드럽게 누비던 그 유려한 손가락은, 자신의 권위를 도전받은 지휘자의 채찍이 되어 세화의 얼굴에 자국을 남겼다. 키가 작고 마른 세화의 몸은 종잇장처럼 힘없이 교실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차가운 왁스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하지만 세화를 가장 깊이 찌른 것은 뺨의 통증이 아니었다. 바닥에 쓰러진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를 흠모하던 아이들의 정당화된 시선과 그가 내뿜는 서늘한 증오였다. 오직 단짝인 규영만이 영문을 모른 채 , 파랗게 질린 얼굴로 안타깝게 세화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집에서는 함구의 무게에 짓눌리고, 학교에서는 침묵이 원인이 되어 공개적인 처형대에 올려진 지금, 이제 이 세상 어디에도 세화를 지켜줄 자리는 없었다. 안팎으로 조여 오는 이 거대한 질식의 굴레 속에서 세화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뿐이었다.
‘가출하자.’
개울에서는 숨을 쉴 수 없고, 강물에서도 버틸 수 없다면, 그래. 차라리 흘러 흘러 바다로 가자. 거대한 물결 속에 이 정결한 고독을 던져, 나를 가두던 모든 경계 너머로 사라져 버리자.
이 서늘한 선언이 온 머릿속을 휘감자, 세화는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교실 문을 거칠게 열고 뛰기 시작했다.
등 뒤로 평소의 우아함은 간데없는 포르티시모의 고함이 쏟아졌다. 성악을 전공한 그의 발성은 복도 끝까지 고움의 생브라스의 트럼펫 향연처럼 울려 퍼졌지만 , 세화는 멈추지 않았다.
낡은 나무 복도가 세화의 발길질에 비명 같은 울림에 더해, 담임의 기괴한 고함이 한데 엉켜 뒤쫓아왔지만, 그보다 더 크고 선명하게 울리는 것은 터질 듯한 자신의 심장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