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옥상에서 울리던 붉은 절규
세화는 지난해 기말고사에서 전 과목 빵점이라는 경악할 숫자로, 온 학교와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 사건 이후 선생들은 앞다투어 그녀를 ‘구제 불능의 바보’라 손가락질하며 낙인을 찍었다.
부모와 형제들 역시 매일 공부도 하지 않고 숙제도 내팽개친 채 밖으로 나도는 세화를 보며 당연한 결과로 여겼다.
부모의 기대는 거의 포기 상태였고, 그 자리는 점점 체념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올백’도 아닌 ‘올 빵점’은 정답의 맥락을 낱낱이 꿰뚫지 않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세화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그 사실을
규영이 알아차렸을 때, 그 충격은 번개에 맞은 듯,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세화가 만들어낸 백지와도 같은 시험지는
제 삶을 옥죄는 허울 좋은 정답들을 단칼에 베어낸 단호한 저항이었고,세상을 향해 소리 없이 내지른 가장 고요한 야유였다.
그날, 육성회비 문제로 담임의 매서운 손끝이 허공을 갈라 세화의 뺨에 꽂히는 순간, 그 타격은 소리보다 먼저
그녀의 넋을 뒤흔들어 놓았다.
세화는 뺨에 찍힌 붉은 자국을 가릴 틈도 없이 곧장 여고 옥상으로 달렸다.
그 뒤를 밟는 친구 규영의 발걸음이 조마조마한 심사를 이기지 못해 자꾸만 헛디뎠지만 세화의 걸음에는 마치 길을 여러번 다닌 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윽고 다다른 옥상 난간. 발아래서 올라오는 소소리바람이 세화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흔들어 눈물 범벅이 된 뺨에 거미줄처럼 흩뿌려 놓았다.
그것은 마치 제 상처를 스스로 휘감아 감추려는 실 같기도 했고, 세상의 모진 손길을 밀어내려는 고요한 몸부림 같기도 했다.
그때, 그녀의 귓가에서 육중한 철문이 쇳소리를 내며 둔탁하게 닫혔다.
그 단절의 틈을 비집고,규영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들이닥쳤다.
“세화야, 세화야…”
그녀를 간절하게 부르는 친구의 목소리에는
차마 다 담지 못한 진심이 실려 있었다.
그 눈빛 속 애틋한 염려가세화의 시선과 맞닿는 순간 그녀의 억눌린 넋이 가늘게 떨렸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옥상 바닥에 주저앉은 세화는 그간 제 목구멍을 옥죄며 고요히 삭혀왔던 온갖 비애와 설움을 한꺼번에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슴 깊은 곳의 응어리를 긁어내는 듯한 통곡이었고, 세상의 모진 손길을 견디다 못해 터져 나온 가눌 수 없는 오열의 파편이었다.
차마 소리 내어 뱉지 못한 말들이 눈물이 되고 비명이 되어 옥상의 허공을 사정없이 채워 나갔다.
규영은 말없이 떨리는 세화의 어깨를 조용히 다독였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인지
나에게 모든 것을 말해줘.”
한참을 흐느끼며 속울음을 게워내던 세화의 곁으로, 어디선가 소리 없는 바람 한 줄기가 스며들었다.
학교 뒤편 울창한 숲에서 올라온 풀내음이
그녀의 달아오른 뺨을 스쳤다.
방금까지 세화가 쏟아낸 눈물의 짠기가
묘하게 뒤엉켜 비릿하면서도 서늘한 향취를 머금고 있었다.
세화는 불어온 바람을 폐부 깊숙이 들이켰다.
가슴팍을 옥죄던 덩어리가 비로소 느슨해지는 것을 느끼며,
제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을 조금씩 허공으로 풀어놓았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해 가슴 안쪽에서 덧나고 물러터진 진물 같은 이야기였다.
아주 오랜 세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꽁꽁 싸매 두었던 제 속내의 옹이를 세화는 마침내 규영 앞에서 하나둘 풀어내기 시작했다.
세화의 침묵은 소리를 낼 수 없는 장애라기보다, 제 안의 들끓는 불길을 끄기 위해 스스로 들어앉은 깊은 수렁과도 같았다.
그 함구가 빚어낸 이 기묘한 사태를 규영은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 참혹한 고요 속에 몸을 웅크린 채 견뎌온 친구의 상처가 얼마나 깊고 험하게 덧나 있었을지짐작하는 것만으로도 규영의 가슴은 솜을 들이킨 듯
꽉 막혀 왔다.
도대체 무엇이 세화의 입술을 이토록 단단히 봉인해 버린 것일까.
규영은 그 침묵 속에 한없이 서늘했을 것을 떠올리며 손을 뻗어 세화의 차가운 손을 꽉 잡았다.
방금 전까지 옥상을 가득 채웠던 오열은 잦아들었지만,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무겁고 투명한 정적이었다.
6월의 햇살은 여전히 잔인할 만큼 눈부셨고,
옥상 바닥의 콘크리트는 세화눈물만큼이나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세화는 규영이 건넨 부드러운 린넨 꽃무늬 손수건을 받아 들고 천천히 눈가를 훔쳤다.
한바탕 쏟아내고 난 뒤의 속은 기묘할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마치 거대한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의 황량한 들판 같기도 했고, 모든 먼지가 씻겨 내려간 직후의 투명한 공기 같기도 했다.
가슴 깊은 곳에 꽉 막혀 있던 덩어리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남은 아릿한 통증이
오히려 세화에게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다.
때마침 옥상 난간을 넘어 불어온 바람이
울음에 지쳐 붉어진 세화의 뺨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6월의 바람은 한낮의 열기를 머금어 미지근했지만,땀과 눈물로 젖은 피부에 닿는 순간만큼은 서늘했다.
곁에 선 규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세화의 시선이 머무는 곳, 6월의 파란 하늘과 맞닿은 난간 너머를 함께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침묵은 어설픈 위로보다 훨씬 무거웠고, 그만큼 따뜻했다.
세화는 규영의 그림자가 자신의 그림자 옆에 가만히 겹쳐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겹쳐진 그림자 사이로,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었다.
눈물이 걷히고 난 뒤의 세상은 이전보다 훨씬
선명하고 잔인하게 다가왔다.
6월의 하늘은 여전히 짙은 청색이었고,
뭉게구름은 그녀들의 표정처럼 모호하게 흐트러지고 있었다.
하지만 세화는 더 이상 그 하늘 광경에 압도되지 않았다.
마지막 수업 종소리가 멀리서 들려왔지만,
두 소녀는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