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숫자 속에 숨겨진 슬픔
세화가 곁에 선 규영을 돌아보며 나직이 물었다.'규영아, 이번 수업 시간 수학이지?"
"아마 그럴 거야. 3과목 까진 자습이고 마지막 수업은 수학이고, 친절한 수학 선생은 핵심 내용을 다시 해준다고 했지 그런데 어차피 잘 이해도 안! 되는데... 난, 그냥 너와 함께 있을래."
세화는 대답 대신 발치에 떨어진 날카로운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거친 콘크리트 옥상 바닥에 주저 없이 선을 긋기 시작했다.
서걱거리는 마찰음은 정적을 깨는 파열음이자,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선언하는 신호탄이었다.세화가 가장 먼저 그려 넣은 것은 한 변의 길이가 1인 정사각형이었다.
이어지는 대각선 하나. 세화는 그 대각선 위에 X 라는 기호를 단호하게 새겨 넣었다.
"우리가 아는 세상은 유리수로 가득 차 보여도, 사실 그 틈새에는 끝도 없고 반복되지도 않는 무한한 숫자들이 숨어 있어."
세화의 돌끝이 바닥을 긁으며 1.41421356... 이라는 소수점 아래의 숫자들을 거침없이 나열했다. '
제곱근'의 개념이었지만, 세화가 다루는 방식은 차원이 달랐다. 소수점 아래의 숫자들이 규칙 없이 나열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결국'대각선'이라는 하나의 실체로 수렴하는 과정은 마치 마법처럼 규영의 시선을 빨아들였다.
이어 세화는 옥상의 지저분한 균열들을 변수삼아 복잡한 다항식을 써 내려갔다. 수식들이 얽히고설키며 바닥을 채워 나갔다.
규영이 보기엔 해독 불가능한 암호 같았던 그 식들이, 세화의 손끝이 지나가자 마법처럼 두 개의 괄호로 묶여 들어갔다.복잡한 세상을 단 몇 개의 핵심적인 인수로 분해하여 구조화 하는 그 과정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세화에게 수학은 단순한 계산이 아니라, 거대한 혼돈 속에서 핵심적인 질서를 추출해내는 분석의 도구였다.
규영은 숨을 멈춘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세화의설명은 교과서의 활자를 넘어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 같았다.
"결국 모든 복잡함은 단순함의 곱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걸 찾아내면 길은 보여."방금 전까지 자신을 짓누르던 현실의 막막함이 세화가 그어놓은 명징한 수식들 속에서 해체되는 기분이었다.
규영은경악했다.
열여섯 소녀의 손에서 탄생한 것은 단순한 낙서가 아니라, 우주의 설계도를 훔쳐본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는 논리적 엄밀함이었다.
옥상의 낡은 콘크리트는 어느새 은하수의 궤적을 기록한 성도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세화야, 너 방금 그거 뭐야? 학원에서도 이해 안 가던 게 한 번에 다 들려.
너, 전교에서 올 빵점 맞던 그 꼴찌 학생, 박세화 맞아?”
세화는 덤덤하게 발로 바닥을 지우면서 말했다..
“규영아, 난 이제 더 이상 못 버틸 것 같아.”규영은 대답 대신 먼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규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식당 옆에 제과점이 하나 있는데, 거기 간혹 우리 또래 애들이 일을 배우더라고. 먹여주고 재워주기도 해. 세화 너처럼 이쁘고 똘똘한 아이는 서로 데려가려고 할걸?"
세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막막하기만 했던 탈출이 구체적인 생존의 밑그림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규영의 부모님은 서울역 앞에서 중·한식당을운영했다.
늘 북적이는 역세권의 중심에서 밀려드는 손님들로 부를 쌓았고, 여러 채의 집을 거느릴 만큼 자리를 잡았다.
장녀인 규영은 그 바쁜 식당 한구석에서 사람들이 주고받는 구인과 구직,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소문을 자연스럽게 들으면서 자랐다.
그녀는 식당 안을 떠돌던 수많은 정보 중 일부가, 세화의 막막한 탈출을 위한 나침반이 될 줄은 알지 못했다.
"서울에서 아주 먼 곳이면 좋겠어.
난 바다가 있는 부산으로 가고 싶어."
세화가 바닥에 있는 돌멩이 하나를 집어 멀리 던지며 말했다.
규영의 머릿속에서 축적된 정보들이 빠르게 조합되었다."
부산은 제2의 도시니까 .중심가에 제과점도 많을 거야. 부산까지 가는 야간 완행열차는 밤새달리니까 요금도 저렴하고, 새벽에 도착하니 눈에 띄지도 않을 테고."
세화와 규영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렸다.담임의 집착이 지핀 불씨는 이미 세화의 마음속에서 거대한 탈출의 도화선이 되어 타오르고있었다.
규영의 확신 어린 말에 세화는 비로소 해결책을 되찾은 것 같아 숨통이 퓰렸다.
그러나 규영은 이제 막 잠재력을 알게 된 이 매력적인 친구와의 이별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친구의 고통을 덜어주고 행복을 찾아주는 것이 진정한 우정이라 여겼다.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희미한 함성이 바람에 실려 조각조각 부서졌다.
그 일상적인 소음들이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의 고요를 더욱부각시켰다.
"가자, 교실로."
규영의 목소리가 바람을 뚫고 나직하게 들려왔다.
세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텅 빈 가슴 속에, 6월의 바람과 규영의 침묵이 조용히 차오르고 있었다.
풍비박산 난 곳, 다시는 교실로 돌아가기 싫었던 세화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규영을 기다렸다. 규영은 곧장 교실로 달려가 두 사람의 가방을 챙기러 갔다.
햇살 아래, 정지된 듯한 골목 옆으로 기와지붕이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늘 보던 ‘약국’ 간판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떠나기로 결심한 세화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게만 다가왔다. 이 골목을 벗어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그녀의 발끝을 떨리게 했다.
세화의 단정한 모습 위로 흰 뭉게구름이 느릿하게 흘러갔다. 그녀는 가방을 챙겨 들고 나타날 규영을 기다렸다. 초조한 시간을 달래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문방구 안을 바라보았다. 뿌연 유리창 너머의 자잘한 풍경을 마음 깊이 새겨 두고 싶었다. 그러다 이 갑작스러운 사태 앞에서 자신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게 된 친구에 대한 미안함이 밀려왔다. 다정한 그녀와 헤어져야 한다는 막연한 슬픔이 뒤섞이며 마음은 더욱 가라앉았다.
그때,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세화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규영은 두 개의 가방을 양손에 쥔 채 텅 빈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하나는 자신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제 곧 연기처럼 사라질 세화의 것이었다.
‘이걸 건네주고 나면, 우리는 정말 함께할 수 없는 걸까.’
마음의 소리가 공중에서 공허하게 울렸다. 돕는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이 선택이 오히려 소중한 무언가를 밀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미세하게 일어나는 흙먼지처럼 붙잡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이별의 실감으로 온몸에 퍼져 나갔다. 이 길만이 세화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친구의 존재를 세상 밖으로 떠밀어 버리는 파문의 시작 같아 마음이 저려왔다.
골목 끝에 이르자 세화가 서 있었다.
세화는 가방을 건네받자 가죽의 감촉이 왠지 생소하게 느껴졌다.
“무거웠지? 미안해.”
세화의 낮은 목소리에 규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아니, 토요일이라 책이 별로 없어서 하나도 안 무거웠어. 마치 깃털 같더라.”
언제나 밝은 규영 덕분에 침울한 상황 속에서도 소녀들은 잠시 미소를 지었다.
규영은 세화의 마른 손목을 조심스레 이끌었다.
“우리 집 가서 맛있는 거 실컷 먹자. 배고프면 마음만 더 시린 법이야.”
세화는 규영의 손에 이끌려 서울역 광장의 매연을 뚫고 규영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커다란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식당 입구는 기차 시간을 앞두고 급하게 한 끼를 때우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커다란 무쇠 솥에서 뿜어져 나오는 뽀얀 김과 달큰한 짜장 냄새, 알싸한 마늘 향이 뒤섞여 실내를 음식 내음으로 채우고 있었다.
"어서 오십쇼!" 하는 종업원들의 절규 섞인 외침과 철제 수저가 그릇에 부딪히는 챙그랑 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카운터 너머로 보이는 규영의 부모님은 몰려드는 주문서를 쳐내느라 입구까지 들어선 두 소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못했다.
규영은 익숙한 듯 북적이는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해 세화를 식당 안쪽 깊숙한 곳으로 이끌었다.
바깥의 소란이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멀어지는 조용한 방이었다.
규영이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어 무어라 청하기만 하면, 방금 볶아내 윤기가 흐르는 중식 요리든 정갈하게 차려진 한식이든 식당 안쪽 방으로 음식이 척척 배달되었다.
“우선 허기부터 달래자.”
규영이 말을 꺼냈다. 그 음절마다에는 단호한 확신이 서려 있어, 마치 정해진 운명의 궤도를 짚어주는 듯하였다.
“네가 단 하루도 이 고비를 버텨낼 재간이 없다면, 속전속결만이 유일한 활로야.
내일 정독도서관에서 만나 종일 책장을 넘기며 숨을 고르다가, 우리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너는 곧장 부산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 거다.”
규영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으나 세화의 귓가에는 명확하게 박혔다. 세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회벽의 서늘함과 붉은 벽돌의 완고함이 대조를 이루던 도서관의 전경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곳은 어쩌면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허락받은 마지막 퇴로이자, 알 수 없는 내일을 향해 쏘아 올리는 서글픈 시발점이 될 터였다.
“밤 열차는 인적도 드물고, 심연 같은 어둠을 차일 삼아 멀리 달아나기엔 그만한 적지가 없거든.”
규영은 마치 보이지 않는 철길을 허공에 긋듯 손가락을 휘저었다.
세화는 그 손가락 끝이 그리는 궤적을 망연히 쫓으며, 이름 모를 간이역으로 향하는 야간열차의 그 육중하고도 고독한 덜컹거림을 심장 안쪽에서 미리 맞이하고 있었다.
식당 문을 나서며 규영은 짤막한 인사 끝에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홀로 남겨진 세화는 규영이 지워진 그 적막한 허공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이제 발길을 돌리면 어머니의 숨 막히는 잔소리가 똬리를 틀고 있는 집이었으나, 오늘 밤만큼은 걸어가는 지면이 솜털처럼 가벼웠다.
일요일 밤, 적막을 가르며 서울역을 나갈 야간열차의 그 길고도 애닯은 경적 소리가 벌써부터 환청처럼 세화의 뼛속까지 파고들고 있었다.
집안으로 발을 들이는 세화의 등 뒤로 적막이 낮게 깔렸다. 엄마의 예상했던 꾸중은 없었으나, 오히려 그 고요함이 살결에 닿는 칼날처럼 서늘했다.
세화는 제 숨소리조차 죽이며 방으로 숨어들 듯 들어갔다.
이윽고 어머니가 내온 저녁상이 눈앞에 놓였다. 이미 규영의 집에서 넘치도록 대접받은 만찬이 위장의 벽을 꽉 채우고 있었으나, 세화는 차마 배가 부르다는 그 당연한 사실조차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어머니가 정갈하게 차려온 음식들은, 먹지 않으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가문의 법도이자 거역할 수 없는 지엄한 명령이었다.
세화는 고통스럽게 숟가락을 들었다. 목구멍은 이미 포화 상태였으나, 억지로 밀어 넣는 밥알들은 마치 모래알을 씹듯 까칠하고도 무거웠다. 한 술 한 술이 위장을 짓누르는 고문이었고, 삼킬 때마다 가슴께가 뻐근하게 조여 왔다. 그것은 음식이 아니라, 어머니의 질서를 몸 안으로 강제로 주입하는 형벌에 가까웠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식의 숨통을 조이고, 자식은 제 존엄을 지키겠다는 몸부림으로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침묵의 형벌을 자처하니, 그 밥상은 허기를 달래는 식탁이 아니라 서로의 진액을 받아내는 서글픈 제단에 다름 아니었다.
배부른 고통이 위장을 짓누를수록 세화는 깨달았다. 이 엇갈린 최선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둠을 틈타 미끄러져 나갈 그 비정한 철길뿐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