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소녀오디세이

7화 아버지의 서재

by Ssan카르트

1970대 후반

세화네 서재는 방 두 개를 터놓은 듯 유달리 널찍하고도 깊은 공간이었다. 아버지가 평생을 아껴 온 그 아늑한 성소에는, 일본의 과학 서적과 전문적인 기계공학 문헌들이 벽면을 빼곡하게 메우며 침묵의 병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곳은 항상 치욕을 동력으로 삼는 1930년 생, 아버지의 훈도가 서려 있는 곳이기도 했다.

“저들의 기술적 도약은 필시 우리 한국의 고혈과 맥이 닿아 있는 법이다. 일제 강점의 치욕 속에서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모든 것들이, 역설적이게도 그들 번영의 밑거름이 되었음이 분명하지 않으냐. 그러니 우리는 저들의 기술을 악착같이, 끝내 넘어서야만 한다.”

아버지는 책상머리에 앉은 남동생들의 귀가 따가울 정도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일본을 향한 ‘분함’은 아버지를 지탱하게 하는 가장 뜨거운 열정이였다.

“근대에는 저들이 고작 10년을 앞섰다면, 지금(1970년 당시)은 30년을 앞서 있다. 일천한 재주를 조금 먼저 맛보았다 하여 유구한 역사를 지닌 우리를 넘어뜨림이 분하고 분하다. 근본도 없는 것들이 서양의 술수를 먼저 익혔다 하여 그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느냐 말이다.”

특히 남동생들을 곁에 앉혀 일본어를 가르치실 때면 서재의 공기는 묘한 긴장으로 가라앉곤 했다.

“내가 이 글자를 익힌 것은 저들의 칼날 아래서였다. 내 목을 겨누던 그들의 쇠붙이가 차가웠으나, 나는 그 차가움을 씹어 삼키며 이 문장들을 익혔지.

이제 이것을 너희에게 건네는 것은 단순히 말을 배우라는 것이 아니다. 적의 심장을 꿰뚫을 그들의 칼을 네 손에 쥐여주는 것이다.”

자식의 입에서 나오는 작은 욕지거리 하나 용납지 않던 엄격한 아버지는, 유독 일본을 지칭할 때만은 ‘놈들’이라는 거친 비어를 서슴지 않았다.


증오가 곧 동력이었던 아버지는 그들이 이룩한 기계공학의 원서들을 밤새워 파헤치며 서재의 공기를 얼음장처럼 가라앉혔다.

그 굳건한 집념의 결과로, 이 폐쇄된 서재에는 바깥세상보다 한 발치 먼저

기이한 문명의 전당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까지 세상은 여전히 흑백의 질서 아래 꽁꽁 묶여 있었다. 당시 사치 풍조를 막겠다는 명분으로 컬러 방송 도입을 쉽게 허용하지 않고 있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땅의 공장들은 타국의 안방을 채울 컬러 TV를 밤낮없이 찍어내고 있었다. 국가는 시기를 늦추고 있었으나 기술은 이미 국경을 넘보고 있던 기묘한 불통의 시대였다.

아버지의 서재는 그 거대한 모순이 응축된 은밀한 망명지였다.


어느날 서재 창밖, 위태로운 사직동의 기와지붕 위에 아버지가 올라가 있었다. '야기 안테나'를 움켜쥔 채, 하늘의 허공을 훑을때. 북악산 아래 웅크린 청와대가 멀리서 보였다.

"나오냐! 지금은 어떠냐!"아버님의 쨍한 호통이 공기를 가르고 지붕 아래 서재

안으로 내리꽂혔다.


브라운관 앞에 함께 선 큰아들이 지직거리는 노이즈를 살피며 숨을 죽였다.

둘째 아들은 창가를 지키며 지붕위에 있는 아버지께 형이 전하는 상태를 즉각 알렸다.


남산이 송출하는 완강한 흑백의 세계를 등진 채, 인왕산 자락의 깊은 음영을 뚫고 용산 기지의 낮은 전파를 낚아채기 위한 사투가 시작되었다. 서재 한 쪽을 차지한 육중한 컬러 TV는 그간 제 빛깔을 내비칠 기회를 박탈당한 채 죽은 듯 놓여 있었다.

지붕 위 안테나가 끼익, 기괴한 금속음을 내며 비명을 지를 때마다 화면은 눈보라 같은 노이즈 속에서 무너지고 살아나기를 반복했다. 산바람에 부딪혀 쪼개진 전파가 갈피를 못 잡고 화면 위에서 무지갯빛 혈관처럼 번뜩이다가도, 손끝이 1밀리미터만 어긋나면 이내 회색빛 정적 속으로 침몰하기 일쑤였다.


그때였다. 숨을 죽이고 안테나의 나사를 끝까지 조인 찰나, 지직거리는 소음 너머로 금지된 주파수가 벼락처럼 맞물려 들었다. 거칠게 휘몰아치던 백색 소음이 일순간 걷히며, 짙푸른 스튜디오 배경 앞에 앉은 AFKN 앵커의 선명한 넥타이와 생생한 핏빛 자막이 화면 가득 쏟아졌다. 남산은 결코 허락한 적 없는, 사직동의 낡은 지붕 아래서만 몰래 목격된 찬란한 세계의 조각이었다.



"나옵니다! 아버지, 지금 여러 색이 다 보여요!"

아이들의 높은 외침이 터져 나오자, 마침내 지독한 노이즈를 뚫고 , 흑백의 세상에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망막을 찌르는 듯한 강렬한 색채의 향연이 펼쳐졌다.


안테나를 꽉 움켜쥔 아버지의 손등에는 팽팽한 힘줄이 돋아 있었다.


아버지는 그 화려함에 취하는 대신,이룩한 기술의 정교함을 확인하 순간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건 집념이었고 아이들에게는 마법 같은 구경거리였으나,

세화에게 그 전파의 파동은 우주의 질서가 빛으로 화하여 내려앉는 풍경일 뿐이었다.


아버지는 권력이 쉽게 허락하지 않았던 그 ‘천연색의 원리’를 서재라는 차가운 수술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누구의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그 구조를 하나씩 분해하듯 더듬어 들어갔다.

전파는 이미 하늘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고, 아버지는 그저 그것을 붙잡아 보려 했을 뿐이었다.

그 일에 이름을 붙이자면 위반도, 저항도 아니었다..

다만, 설명되지 않은 선 하나를 조용히 넘어보는 일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안방의 브라운관에는 여전히 무미건조한 흑백의 그림자가 흘러가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서재에는 이미 다른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다이얼을 돌리면 전등의 밝기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작은 회전식 조광기가 있었고, 또한 서재 한쪽에는 붉은 숫자가 흔들림 없이 시간을 넘기고 있는 전자시계가 놓여 있었다.

그건 아버지가 완벽하게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 시계는 한 번도 틀리지 않았다.


그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연필을 밀어 넣는 순간 웅웅거리며 살아난 듯 돌아가던 전동 연필깎이였다.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 만든 그것은 편리하면서도 기괴한 문명의 소리를 냈다.

이 집 형제들의 동네 친구들은 저마다 필통을 손에 쥐고, 그 편리한 기계 앞에 연필을 갂기 위해, 하루하루 대기하며 줄을 섰다.

조심스레 연필을 밀어 넣으면, 기계는 기다렸다는 듯 웅웅거리는 진동과 함께 날카로운 기계음을 내뱉으며 연필을 받아들였다. 손가락 끝에 전해지는 낯선 박동과 순식간에 깎여 나오는 완벽한 원뿔 모양의 연필심이 손쉽게 되자,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야, 진짜 스위치 누르기만 하면 깎여! 냄새도 신기해!"

아이들에게 그것은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줄 신기한 유희였으나, 세화에게 그 소음은 전혀 다른 층위의 신호였다. 세화는 연필 깎는 소리에 열광하는 아이들의 등 뒤에서, 기계 내부의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각도와 모터의 회전수가 만들어내는 물리적 파형을 마치 정교한 기계로 훑어내듯 제 머릿속에 고스란히 훑어담았다.

권력이 기술의 흐름을 일정한 틀 안에 두려 할 때, 아버지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언젠가 그 너머를 보기 위해 쉽게 닿을 수 없던 기술의 핵심을 도려내듯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비록 그 시작이 일본에 대한 증오로 강하게 시작되었을 지라도, 원서를 파헤치던 아버지의 고독한 등판은 시대의 거친 질서를 견뎌내는 또 다른 방식의 버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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