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가을 운동회와 영사기
유투브영상 나레이션( 8화 본문 일부)
https://www.youtube.com/watch?v=plt_nloigMw
사직동 좁은 골목에 땅거미가 짙게 깔리고 하늘이 감청색으로 물들 무렵이면, 돌담 사이로 갓 쪄낸 술빵을 가득 담은 커다란 쟁반을 들고 영식이 어머니가 나타났다.
그 뒤를 이어 신발 뒤축을 구겨 신은 아이들의 발소리가 골목의 정적을 깨우며 경쾌하게 튀어 올랐다.
“우와, 술빵이다!”
아이들의 해맑은 외침이 적막하던 골목을 순식간에 활기로 채웠다.
곧이어 정체 모를 용처럼 하얀 김을 내뿜는 찐 고구마 쟁반을 들고 순철네와 형석네 어머니도 따라붙었다.
인왕산에서 불어온 찬 바람이 골목을 스치고 어둠이 깊어지면, 세화네 마당은 이웃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정겨운 광장이 되었다.
흰 회벽을 마주하고 툇마루와 돗자리 위로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 무언가를 향한 기다림이 효모처럼 부풀어 오를 때, 사직동의 밤은 말없이 하나의 거대한 집합소가 되었다.
여전히 안방의 흑백 TV가 회색빛의 건조한 세상을 보여주던 1970년대 후반, 세화네 마당은 그 동네에서 유일하게 찬란한 어제로 통하는 비밀 통로를 품고 있었다.
깊은 어둠이 내리면 아버지는 묵직한 가죽 가방을 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가방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차가운 금속광택을 내뿜는 8mm 영사기였다.
아버지는 엄숙한 표정으로 장독대 사이에 검은 차광막을 정밀하게 쳤다.
지난가을 운동회 날, 아버지가 무거운 촬영기를 어깨에 메고 부지런히 담아냈던 동네사람들의 시간이 갈색 필름 릴 속에 잠들어 있었다.
“아들아, 필름 위의 작은 먼지 하나가 벽 위에서는 세상을 가로막는 커다란 바위가 되는 법이란다.”
아버지는 갈색 릴을 영사기 톱니바퀴에 물리며 지극하고도 섬세한 손길로 렌즈를 닦았다.
이윽고 아버지가 레버를 돌리자 ‘탈탈탈탈’ 거리는 경쾌한 구동음이 정막을 깨뜨렸다. 렌즈에서 뻗어 나간 한 줄기 강렬한 백색광이 밤공기를 뚫고 회벽에 닿았다.
“우와, 나온다……!”
누군가의 탄성과 함께 흐릿하던 빛 덩어리가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화면 속에는 커다란 고깔을 쓰고 소고를 들고 춤을 추는 아이들이 천연색으로 살아 움직였다.
이어 화면은 운동장 옆 커다란 미루나무 그늘 아래로 옮겨갔다. 돗자리를 펴고 앉아 너나 할 것 없이 김밥과 삶은 달걀을 나눠 먹던 점심시간의 풍경이 펼쳐졌다.
화면 귀퉁이에서 손주 입에 연신 김밥을 넣어주며 환하게 웃으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비치자, 툇마루 곳곳에서 낮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어머, 저기 좀 봐! 저거 우리 영식이 아니야?” “어이구, 정말이네! 야, 영식아! 너 저기서도 코 흘리고 있네!”
마당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붉은 꽃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컬러 화면 속으로 사람들은 빨려 들어갈 듯 몸을 기울였다. 아들을 더 자세히 보고 싶으니 조금만 천천히 돌려달라는 애절한 부탁에, 아버지는 “기계라 마음대로 안 됩니다”라며 짐짓 엄하게 대꾸했지만,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먼발치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세화는 깨달았다. 아버지가 만지는 것은 차가운 쇠붙이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 빛으로 세상을 재구성하는 권능이라는 것을.
좁은 골목에 갇혀 있던 마당의 회벽은 더 이상 벽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깥세상으로, 혹은 그리운 어제로, 혹은 가보지 못한 내일로 연결된 거대한 무지갯빛 문이었다.
필름이 마지막 한 칸까지 돌아가고 ‘착착착’ 소리를 내며 빈 릴이 헛돌 때까지, 세화는 그 문 너머의 세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 순간 온 동네의 시간을 찬란한 색으로 되돌려놓은 신령님과 같았다.
영사기의 열기가 식어갈 무렵, 세화의 마음속에는 지지 않는 빛 한 줄기가 깊게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