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소녀오디세이 8화

아버지의 서재

by Ssan카르트

#가출소녀오디세이

#브런치소설



8화 #유투브영상나레이션.

https://youtube.com/shorts/forDXk_tw3s?si=yBLt5njPikZNte-z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서재는 집안의 성역이었다. 그녀는 그곳을 단순한 공부방이 아니라, 끔찍이 아끼는 아들들의 미래가 빚어지는 신성한 제단처럼 받들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의 출세를 빌며 마치 의식이라도 치르듯 걸레를 눈처럼 하얗게 삶아 청소했다.


"세화야, 걸레 끝이 저게 뭐냐. 결 따라 한 방향으로 밀어야지. 먼지를 닦는 게 아니라 네 마음의 때를 벗긴다 생각하고 정성을 들여라. 아버님 공부하시는 자리 아니니."


어머니는 늘 완벽함을 추구하며 강조하듯 말했다.


"반 시간 지날 때마다 바닥 한 번씩 더 훔쳐내라.

네 남동생들 머릿속에 잡념 한 톨 안 앉게, 네가 그 먼지 다 거두어내야 한다."

이렇게 수업 중에도 세화가 바닥에 앉아 대기하다가, 삼십 분마다, 내려앉은 작은 먼지조차 닦아내게 했다.


어머니는 문밖에서 나지막이 들려오는 부자의 수업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차를 마시는 그 시간을 가장 큰 낙으로 삼았다. 서재가 품은 정결함에 온 마음을 바칠 때,

그 집요한 정성의 끝단에서 말없이 움직이던 이는 세화였다.


"절대 소리 내지 마라. 발뒤꿈치 들고, 숨소리조차 문턱을 넘지 않게 조심해. 아버님 목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야 신성한 수업이다."

세화의 가늘고 섬세한 손가락은 먼지 하나 허락하지 않는 어머니의 결벽을 따라 서가 구석구석을 훑어 내렸다.


그 꼼꼼함이 마음에 들었던지, 어머니는 망설임 없이 서재 정돈을 딸에게 맡겼다


"웬일로 네가 밖으로 안 나가고 군소리 없이 집에 붙어 있구나. "

어머니는 의아하다는 듯이 매번 말을 건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늘 밖으로 떠돌던 그녀였건만, 이상하게도 그 시간만큼은 고분고분 집에 머물렀다.


먼지를 닦아내는 고요한 시간 속에서, 세화는 제 안의 소음이 잦아드는 특별한 평온을 맛보고 있었다. 그녀는 누구의 눈길도 닿지 않는 서재의 서늘한 종이 감촉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좋아했다.


세화는 특히 아버지가 열변을 토하며 쏟아내는 강의를 묵묵히 듣는 시간을 무척 소중히 여겼다.


그가 토해내는 뜨거운 문장들이 서재의 서늘한 공기와 만날 때, 밖으로만 겉돌던 그녀의 마음은 비로소 아버지의 수업에 닻을 내렸다.


그렇게 아버지와 남동생들이 공부하는 곁에서 바닥을 닦으며 수업을 곁눈질하던 그녀의 가슴속에도, 아버지가 지핀 불꽃의 씨앗이 옮겨붙었다.남동생들은 학습의 무게에 눌려 고개를 떨구었으나 그녀는 달랐다.


격정적인 문장들 사이에서 세화는 자신이 넘어서야 할 실체로서의 기술과 언어를 매일같이 예리하게 포착해냈다.


남동생들에게만 주입되던 치열한 지식들은 그녀의 명민한 사고를 통해 정교한 논리와 수식으로 치환되고 있었다.수업이 끝나고 서재에 공허한 긴장감이 남으면, 세화는 칠판을 지우기 전 그 위에 남겨진 난해한 수식들을 정교한 기계처럼 자신의 머릿속에 훌터 담았다.


그녀는 아버지가 부러뜨린 분필 조각들을 작은 병에 모았다. 그러고는 그가 동생들에게 읽으라 했던 책들을 몰래 빼내어 장독대가 있는 옥상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세화는 아버지가 도저히 닿지 못한 학문의 희열을 마음껏 풀어냈다.


사실 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세화 자신조차 자신이 남과 다른 천재라는 사실을 추호도 알지 못했다. 오히려 부모는 세화를 평범한 아이보다도 뒤처진 존재로 여겼다. 세화 역시 인간이 새처럼 날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지 않고, 두 발로 걷는 것을 기적이라 여기지 않듯, 그녀에게 숫자의 질서와 언어의 결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당연한 감각이었다. 아버지가 그토록 분해하며 넘어서려 애쓰던 그 ‘격차’조차, 세화에게는 장독대 위에 내리는 달빛처럼 은은하고 자연스러운 풍경일 뿐이었다. 비범함은 노력이 아닌 생존이었고, 천재성은 성취가 아닌 본능이었다.


복잡한 기호들이 항아리의 곡선을 타고 유영할 때마다 세화는 온몸을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 남동생이 서재의 안락한 의자에서 졸고 있을 때, 세화는 옥상의 뙤약볕을 견디며 스스로 선생이자 제자가 되어 학문을 일궈냈다. 옹기들은 세화의 거침없는 논리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주는 유일한 청중이었고, 고요함 속에 익어가는 장 냄새는 그녀의 지식이 발효되는 향기였다.


어느 날, 서재의 구석진 어둠을 닦아내던 세화의 손길이 멈췄다. 늘 제자리라 여겼던 서랍장 밑동, 뒤틀린 틈새에서 짐승의 눈처럼 번뜩이는 오동나무 상자가 보였다. 손끝을 깊숙이 밀어 넣어 끌어당기자, 수십 년간 먼지를 뒤집어쓴 채 숨죽이고 있던 세월이 묵직하게 딸려 나왔다. 상자 안에는 낡은 노끈으로 묶인 일기장 여러 권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종이 뭉치가 아니라, 한 소년이 지나온 고통스러운 생애의 단면을 간직한 채 굳어버린 슬픈 지층이었다. 세화는 첫 번째 지층을 조심스럽게 꺼내 품에 안았다. 마른 살가죽 같은 종이의 질감이 가슴팍에 서늘하게 닿았다.


그날 이후 세화의 오후는 은밀한 의식이 되었다. 공부할 책들 사이에 일기장을 숨겨 옥상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떨림으로 가득했다. 옹기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그곳에서 세화는 노끈의 매듭을 풀었다.

그 안에는 열다섯 살 소년의 치열한 세계가 국한문이 혼용된 엄격한 필체로 기록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일기] “금일(今日)도 학교(學校)에서는 국어(國語:일본어)만을 강요(强要) 하니, 내 입술은 얼어붙은 동토(凍土)와 같다. 아버님께서 늘 조국(祖國)의 어문(語文)을 잃는 것은 곧 혼(魂)을 잃는 것이거늘, 하시며 안타까워하시기에 밤마다 등(燈) 불 아래 은밀(隱密) 히 국문(國文)과 한문(漢文)을 쓰며 내 존재(存在)의 근거(根據)를 묻는다. 복중(腹中)의 기아(飢餓) 보다 무서운 것은 정신(精神)의 망실(亡失)이라. 언젠가 이 흑암(黑暗)의 시대(時代)가 끝나면, 나의 후사(後嗣)들은 양지(陽地) 바른 곳에서 마음 놓고 책(冊)을 독수(讀數)할 수 있기를 기원(祈願)하노라.”

세화의 시선이 ‘정신의 망실’이라는 대목에서 멈췄다. 자신이 장독대 위에서 일궈낸 논리들이, 사실은 이 소년이 목숨과 바꾸려 했던 그 ‘정신’의 부활이었음을 깨달았다. 서재 아래에서 남동생이 평화롭게 졸고 있을 시간, 세화는 옥상에서 소년의 문장을 한 자 한 자 삼키고 있었다. 사실 그것은 이 소년이 목숨과 바꾸려 했던 ‘정신’의 부활이었다.


“아...

세화의 눈에서 떨어진 뜨거운 눈물방울이 누렇게 바랜 종이 위로 툭, 떨어졌다. 잉크가 번지듯 눈물은 소년의 원통함 속으로 스며들었고, 굳어있던 문장들은 세화의 슬픔을 빨아들이며 비로소 맥박 치기 시작했다. 세화는 일기장을 가슴에 꼭 품고 옹기에 이마를 기댔다. 옥상의 장 냄새는 이제 지식의 향기를 넘어, 시대를 건너온 한 영혼의 발효된 진심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버지의 일기/ 현대 버전


오늘도 학교에서는 일본어만이 강요되었다. 입술이 얼어붙은 것처럼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아버님의 말씀처럼, 언어를 잃는 것은 결국 정신을 잃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 생각 때문에 밤이면 불을 켜고 조용히 국문과 한문을 적어 본다. 그것은 단순한 공부가 아니라, 내가 나로 남아 있기 위한 확인 같은 것이다.

굶주림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정신이 사라져 가는 감각이다. 이 어두운 시간이 언젠가 끝난다면, 그때의 사람들은 마음 놓고 책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