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소녀오디세이

4화 생브라스와의 한판

by Ssan카르트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한 정적이 교실을 훑고 지나간 뒤, 그 짧은 고요의 틈을 비집고 세화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잔혹한 소동이 시작되었다.

그 서막은 담임이 교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는 순간에서부터였다.


2주 전에 학교 부속 건물 공사비를 명목으로 육성회비를 평소보다 훨씬 앞당겨 납부하라는 공고가 내려왔다.

학급 납부 실적이 곧 자신의 유능함이라 믿었던 담임은 매일 종례 때, 아이들을 들볶으며 실적에 혈안이 되어 몰아붙였다.


세화는 늘 언니와 동생이 회비를 챙겨가는 날이면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부모님이 알아서 제 몫을 챙겨주곤 하셨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고 없이 앞당겨진 기한이 문제였다. 세화는 그 독촉 앞에서 차마 돈을 달라는 말을 입 밖으로 밀어내지 못한 채, 며칠을 가슴만 누르며 끙끙 앓았다.


종례 시간마다 교실 안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담임은 출석부 뒷장을 넘기며 미납자 확인을 반복했다. “아직 안 낸 사람, 손 들어.” 그 명령 아래, 하루가 다르게 손을 드는 아이들의 숫자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어제, 금요일엔 교실 안에 손을 든 아이가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된 순간— 세화는 끝내 그 ‘공개적인 망신’이 두려워 손을 들지 못했다.


세화는 남부러울 것 없는 중산층 가정의 자녀였다. 굳이 입을 열어 떼를 쓰지 않아도 비슷한 학년의 형제들이 필요한 것을 챙길 때면 부모님은 말 없는 딸을 위해, 늘 세화의 몫까지 나란히 챙기곤 하셨다. 형제들과 보조를 맞춰 준비된 단정한 옷차림은 세화를 늘 결핍 없는 아이로 보이게 했다. 반 아이들 역시 세화가 풍족한 집안의 아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게다가 몇 주 전, 아침부터 비가 몹시 퍼붓던 날이었다. 아버지는 남동생과 함께 기사가 딸린 차에 세화를 태워 등교시켰다. 번쩍이는 자동차 문을 열고 내리는 자신을 학급 친구 몇 명이 부러운 듯 쳐다보았고, 세화는 그 시선의 온도를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60여 명의 시선이 쏟아질 그 찰나의 정적이 두려워 세화는 끝내 손을 올리지 못했다. 제 번호가 불리지 않기만을 바라며 고개를 숙인 채 숨을 죽였다. 아이들의 손이 모두 내려간 것을 확인한 담임은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교실 문을 나섰다.


그러나 눈가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토요일 아침, 노란 서류철에 적힌 미납자 명단에서 끝내 지워지지 않은 ‘박세화’라는 석 자를 확인한 담임은 세 번째 시간, 자기 과목 수업과 자습 감독을 위해 교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섰다. 어제의 흡족했던 미소는 간데없고, 배신이라도 당한 듯 일그러진 얼굴로 교탁을 내리쳤다.


“박세화, 앞으로 나와!”

세화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교탁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운동장의 모래 먼지가 입안에 고이는 기분이었다. 담임은 마치 교활한 거짓말쟁이를 내려다보듯 경멸 어린 시선을 깔며 교탁을 돌아 나와 세화 앞에 섰다.


그는 성악을 전공한, 서른 하나의 젊고 유능한 음악 담당 선생이었다. 언제나 몸에 딱 맞는 슈트를 입고 은은한 스킨 향을 풍기며 그가 복도를 지날 때면 교실 안은 묘한 설렘으로 술렁였다. 나이에 비해 정신연령이 높고 감수성이 예민한 여학생들은 그를 향해 남몰래 깊은 가슴앓이를 하곤 했다. 반면 외향적인 성격의 소녀들은 그의 매력을 입에 올리며 복도가 떠나가라 호들갑을 떨거나, 자신의 마음을 공개적으로 떠벌리고 다니는 일도 예사였다.

“오늘도 진짜 멋있지 않냐?”

“웃을 때 봤어?” 몇몇 소녀들이 서로의 팔을 붙잡고 속닥거리다 못해 거의 외치듯 말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누군가는 괜히 교무실 쪽을 기웃거리며

“나 진짜 너무 멋있어서 죽을 것 같아.”

그 말과 함께 가슴을 움켜쥔 채 뒤로 휘청하며 기절하는 시늉을 하자, 옆에 있던 아이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와 장난스러운 비명들이 뒤섞여 복도는 한동안 작은 소동처럼 들썩였다.


그는 가난하고 삭막한 시대에서 유일하게 결이 다른 귀티를 지닌 존재였다.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가 위엄 있게 놓여 있는 음악실은 그만의 성소였다. 그의 우아한 발성과 절제된 매너는 아이들에게 단순한 선생님 이상의, 일종의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에게 학급은 자신이 지휘하는 결점 없는 오케스트라여야 했다. 하지만 세화의 거짓말은 그 매끄러운 악보 위에 떨어진 추한 얼룩이었다. 어제 교무실에서 유일하게 미납자 없는 학급으로 인정받아 은근히 마음속으로 으스댔던 자신을 단번에 묵사발로 만들어 오점을 남겨버렸다.


"학급 성적까지 갉아먹는 해충 같은 존재, 전교 꼴찌 박세화. '내 이것을 그냥...!'"


기한을 넘긴 육성회비 미납 사실을 재차 확인한 그의 눈빛은 평소의 지적인 광택 대신 차가운 멸시로 번뜩였다. 그의 가장 큰 분노는 어린 학생이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완벽했던 자신의 지휘가 보잘것없는 학생 한 명의 거짓말에 휘둘렸다는 모멸감이 그를 지배했다.


“박세화. 집에서 돈 안 주니? 아니면 네가 중간에서 슬쩍 써버린 거야?”


지난주에 다친 이마에 가시지 않은 멍자국이 남은 세화는 수치심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고개를 더 깊이 숙였지만, 담임의 시선은 송곳처럼 세화의 정수리를 찔렀다.


“어디서 감히 선생을 속여?”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그의 길고 곧은 손끝이 세화의 뺨을 휘갈겼다. 평소 건반 위를 부드럽게 누비던 그 유려한 손가락은, 자신의 권위를 도전받은 지휘자의 채찍이 되어 세화의 얼굴에 자국을 남겼다. 키가 작고 마른 세화의 몸은 종잇장처럼 힘없이 교실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차가운 왁스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하지만 세화를 가장 깊이 찌른 것은 뺨의 통증이 아니었다. 바닥에 쓰러진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를 흠모하던 아이들의 정당화된 시선과 그가 내뿜는 서늘한 증오였다. 오직 단짝인 규영만이 영문을 모른 채 , 파랗게 질린 얼굴로 안타깝게 세화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집에서는 함구의 무게에 짓눌리고, 학교에서는 침묵이 원인이 되어 공개적인 처형대에 올려진 지금, 이제 이 세상 어디에도 세화를 지켜줄 자리는 없었다. 안팎으로 조여 오는 이 거대한 질식의 굴레 속에서 세화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뿐이었다.


‘가출하자.’


개울에서는 숨을 쉴 수 없고, 강물에서도 버틸 수 없다면, 그래. 차라리 흘러 흘러 바다로 가자. 거대한 물결 속에 이 정결한 고독을 던져, 나를 가두던 모든 경계 너머로 사라져 버리자.


이 서늘한 선언이 온 머릿속을 휘감자, 세화는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교실 문을 거칠게 열고 뛰기 시작했다.


등 뒤로 평소의 우아함은 간데없는 포르티시모의 고함이 쏟아졌다. 성악을 전공한 그의 발성은 복도 끝까지 고움의 생브라스의 트럼펫 향연처럼 울려 퍼졌지만 , 세화는 멈추지 않았다.


낡은 나무 복도가 세화의 발길질에 비명 같은 울림에 더해, 담임의 기괴한 고함이 한데 엉켜 뒤쫓아왔지만, 그보다 더 크고 선명하게 울리는 것은 터질 듯한 자신의 심장 소리였다.

작가의 이전글가출 소녀 오디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