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보내고
엄마들끼리 하는 브런치 모임.
브런치 모임을 다녀와서
기분이 점점 가라앉거나,
혹여.. 시일이 지남에 따라 화(火)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경험을 해 보았는가?
그 화(火)가 작은 먼지에서 시작한듯하나
나비효과처럼 번져
후폭풍 앓이를 해 본 적이 있는가?
브런치의 후폭풍은
각자가 다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도 다르다.
후폭풍이 거센 정도를 두 가지로 나누어 보면
첫 번째는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오는 케이스라고 하겠다.
브런치를 다녀온 한 엄마가 상담을 한다.
심각한 표정과 무거운 기운을 오래 머금었다가..
“언니. 나는 엄마들 모임에만 다녀오면 화가 나요.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난 이런 사랑을 못 받고 자랐을까?
받아보지도 못한 사랑을 어떻게 주나 싶고..
심지어 난 학교를 엄마 손잡고 가 본 적도 없는데.”
헉. 무슨 말이지?
이해 안 되는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집중하자
계속 이어지는 말.
“나 이상하죠?
이런 얘기를 들으면
내 아이가 생각나는 게 아니라
나한테 대입이 되면서
자꾸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나요.
혼자 외롭게 지냈던..
그 옛날의 일이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나요.
내가 좀 이상한 거 같아요.”
그리고 며칠 후
“생각할수록 화가 나요.
우리 엄마는 나한테 왜 그랬을까?
그 어린 나에게..
그래서 내가 이렇게 컸나?
그 어린아이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갈수록 화가 나서 미치겠어요.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친정 엄마가 꼴도 보기 싫을 정도로 미워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들어줬다.
많이 아팠구나.. 많이 힘들었구나..
처음 이런 상담을 들었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알게 되었다.
정도의 차이이지
나 역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알았다.
그 누구나
부모와 함께한
감정의 상처가 있다는 것을.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여자가 엄마가 되면,
철이 드는 시기가
아니 연륜을 갖기 시작하는 나이가
아이 학령기에 접어들면서인 듯하다.
분명히 아기 낳기 전까지는
자신의 학창 시절이나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볼 기회가 별로 없고
또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새로운 가정을 꾸려 미래를 대비하며
살아가는 삶에 형식에서 과거 회상은 쉽지 않다.
그러나 ‘내 아이’라는 새로운 생명을 키우며
아무 데나 널브러져 있던 감정이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온다.
나에게 오마주 되어~
세월 속에 잊혀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어제일처럼 생생해지며
무의식이 일제히 고개를 쳐든다.
그것이 원망이든, 고마움이든, 이해이든,
그 어떤 것이든 간에
잠깐씩 다녀오는 나의 옛 기억 탐방은
여러 감정을 한 번에 느껴야 하기에
힘들고 지친다.
이때!
우리는 이것에 집중해야 한다.
옛 기억 탐방을 다녀온 나를
그대로 존중해 줘야 한다.
그 어떤 누구보다 내가 나에게 해주는
인정과 존중은 반드시 나의 밑거름이 된다.
‘와~ 정말 힘든 시간을 잘 버텼었네.
그런 힘이 나에게 있었던 거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자리에 있네.
장하다!
잘했다!’
이 순간!
내 마음을 돌보지 않으면
긴 기간 방황을 하게 된다.
또
방황을 좀 하면 어떠한가?
그래도 다시 ‘나’로 돌아오면 된다.
아이를 키우며
친정엄마와의 사이가 멀어진 엄마도 보았고
인연을 끊었다가 다시 만나는 엄마도 보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견뎠다는 것이다.
혹여.. 부모와 단절된 결과를 마주하고 있더라도
그건 혼자만의 힘을 기르는 과정인 것이다.
그 어떤 경우든
견뎠다는 건
그만큼의 딱지가 생겨
단단해졌다는 의미이다.
성장하며 부모와 부딪히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의사 표현을 분명하고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성숙한 미성년자가 있었을까?
성인이 되고도 넘쳐흘러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인
불혹을 넘기고 알았다.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어려운 일임을.
두 번째는 알에서 못 나오고
스스로를 가두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모임 내내 밝은 얼굴을 하고
적당한 호응과 맞장구도 치며
분위기를 잘 맞추지만
이들의 경우에는 공통점이 있다.
“나는 그렇게까지 못해.
우리 애는 그렇게까지 못해.
그렇게까지 해야 돼?
나는.. ”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심란한 표정은 감출 수 없다.
몇몇이 자리를 뜨고 소수가 모이면
부정적인 말을 서서히 끄집어낸다.
꼬투리 잡기에 바쁘다.
그리고 그런 얘기들로
시간을, 에너지를 소비한다.
모임 후,
혼자 돌아가서는
자존감이 곤두박질하여
지하 땅굴을 파고 있다.
그것이 외모이든 학력이든 경제력이든
아니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비투스이든..
무엇을 느꼈건 본인의 입 밖으로
절대 내뱉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런 생각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어렵다.
아무도 모르게 자기만의 동굴로 들어간다.
이 동굴은 생각보다 깊고 어둡다.
공이 바닥을 쳐야 올라올 수 있다고 했던가?
깊은 우물에 빠져 스스로를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경우는
정말 ‘성숙’이라는 단어가 모자를 정도로
자기애의 근본을 갖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자신과 비슷한 부류에서 벗어 나오지 못한다.
아니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학습되고 익숙한 감정을 찾는다.
다시 말해,
습관 된 감정을 되풀이할 뿐..
살면서 나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본 적이 있는가?
나의 감정의 바닥을 오롯이 맞이한 적이 있는가?
그럴 기회가 주워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삶은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하듯
아마도 이런 기회에
나를 알아가는 과정을 거친다면
그건 삶의 방향이 옳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 생명을 키워내는 과정은
육아의 테두리가 아닌
나를 채워가는 과정이란 생각을 해본다.
나를 발견한 그 순간
외면하지 말고 나를 만나 보자.
이왕 내려간 바닥에서
뿌리를 다져 놓으면 어떨까?
너무 서둘러 올라올 필요가 없다.
나를 다지는 시간이니..
시간이라는 마술은
힘든 만큼의 보상을 주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