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제3편
무언가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다. 그것은 그저 반응하지 않는다는 그 자체일 수도 있었고, 예민한 것에 선택권을 부여해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이어오니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저 티를 내지 않는 것과도 비슷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둘 다 무언가를 숨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의 상처받는 말에 반응하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신경 쓰지 않는 것과 내가 상처받은 것에 대해서 티를 내지 않는다면 표면적으로 볼 때 그 누구도 나의 아픔과 상처를 볼 수 없다. 물론 지속해서 내가 힘듦을 겪게 되면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동족방뇨(凍足放溺)’ 식이라도 일시적인 것이라도 그 효력에 크게 가치를 두었다. 이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실패 속에서도 답을 찾듯이 무엇이라도 시도해보지 않는 것이 더 나에게 이롭지 않다는 생각에 시도해보았다.
역시 뜨거운 것도 만져봐야 그것이 진정으로 뜨거운 것을 아는 것처럼 마음에도 크게 화를 입히고야 알게 되었다. 그저 티를 내지 않는 것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관계의 단절로 귀결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무관심하려고 노력하고 내가 나 스스로 감정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서 노력할수록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그 관계들이 미워지기 시작했고 나도 미워지기 시작했다. 아마 무언가에 회의감을 느낀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인색해지게 되고 신경을 쓰지 않다 보니 그것이 남에게는 예민하지 않은 사람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고 감정에 무딘 사람 정도로 여겨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내가 전부터 바라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노력으로 내가 그런 사람으로 비추어진다는 것이기에 어쩌면 이것도 결실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답은 아니었다. 나는 누군가와 상호작용하고 그 반응 속에서 큰 의미와 기쁨을 찾는다는 것을 그때 확실히 알았던 것 같다. 그저 무언가에 세심하게 반응하고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나만은 그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이 있었던 것 같다. 또한, 내가 다른 사람과, 그리고 내가 나 스스로와 감정으로서 관계를 맺지 않고 단절하려고 하니 내가 그 스스로 속이 곯아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은 온전한 나의 감정도 아니었고 그 자체로도 내가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나 그 자체를 부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런 사람인데 그것이 싫어 바꾸려고 하다 보니 그것이 오히려 나를 상처를 입게 했고 나의 모습을 잃게 했던 것 같다. 원래 걷던 길을 그대로 걸어왔다면 아마 나는 상처도 아픔도 없이 나의 모습 그 자체로 살아왔을 것 같다. 하지만 잠깐, 아니 꽤 오랜 시간, 시간을 내어 돌아와서 다시 그 길로 돌아간 지금에서야 내가 나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모습도, 저 모습도, 그 모습도 모두 나다. 하지만 그저 나 자체의 좋지 않은 모습을 그대로 두는 것도, 또는 그 자체를 그저 부정만 하는 것도 모두 내게는 옳지 않았다. 나는 상처로서 조금 더 나를 키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