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 속으로: 인왕산, 수성동 계곡, 효자로, 경복궁

by 지현옥


가을은 날마다 좀 더 짙고 그윽해지며 만추를 향해 가고 있다. 시리게 파란 하늘과 붉고 노랗게 빛나는 단풍이 눈물겹게 아름다워 들뜨기도 하고, 떨어져 내린 낙엽을 밟을 땐 쓸쓸함이 밀려들기도 하며, 가을은 마음을 흔든다.


​보내기 아쉬운 계절을 붙잡고 싶은 마음으로 일찍 밖으로 나섰다. 오늘도 발길이 서촌으로 향했다. 서촌과 경복궁을 지키듯 내려다보고 있는 인왕산을 가보기로 했다.



경복궁역에서 내려 사직동 쪽으로 사직단 담장을 끼고 자박자박 걸었다. 사직단은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으로, '사'는 토지신, '직'은 곡식신을 말한다. 돌담 밑으로 남천이가 예쁘게 물들었고, 기와 담장 너머로 사직단 안의 단풍들이 햇살을 머금고 맑게 빛나고 있었다.


전통 활쏘기를 부흥시키려는 고종 황제의 뜻으로 세워진 황학정을 지날 때는 황색 곤룡포를 입고 활을 쏘는 모습이 마치 학과 같았다는 고종황제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다. 한양의 역사를 따라 걷는 길에 뒹구는 낙엽들을 보며 한 시대의 국운도 추풍낙엽처럼 스러져 갔음을 보는 듯했다.


인왕산 호랑이 동상을 만나고 성곽길에 들어섰다. 초입은 그다지 급하지 않은 길이라 동네 뒷산처럼 아늑했다. 숲과 성곽 사이로 걷는 길에 간간이 들꽃들이 보이고 바람 소리가 귓속으로 스미고 새소리가 들렸다.


인왕산 자락에도 가을이 깊었다. 성곽 사이로 들어오는 단풍은 한 장 한 장 만추의 풍경화가 되었다. 뒤돌아보면 서울 도심이 아득하게 펼쳐지고 범바위까지 오르자 파노라마 뷰가 펼쳐졌다.


정상까지는 곧장 오르막이다. 338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꼭대기로 갈수록 가파르고 바위산이라 로프를 잡고 올라야 한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끙끙대며 11월의 옅은 햇살에 땀까지 흘렸다.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경복궁, 청와대가 보이고 서울 타워가 멀리 흐릿하게 들어왔다.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눈으로도 인왕산은 경복궁을 지키는 우백호로서 우뚝 버티고 있었다.


가파른 산은 하산이 더 어렵다.

약수터 방향 데크길로 쉬엄쉬엄 내려왔다. 가을이 무르익은 숲은 바람이 스칠 때마다 낙엽이 꽃잎처럼 흩날리고 떨어진 잎들은 숲길을 오색으로 수놓으며 꽃으로 피어있었다. 아름다운 숲에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에 천천히 단풍꽃들을 즈려밟고 걸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내리는 늦가을 햇살이 조명처럼 분위기를 더하는 숲속 벤치에 앉아 완연한 가을에 묻히기도 했다. 꽃은 온산을 물들이지 못하지만 단풍은 산 전체를 물들이고 산그늘에 앉은 길손의 마음까지 노랗고 붉은 기운을 지펴 놓았다.


​붉게 물든 화살나무 길을 따라 내려와 수성동 계곡에 닿았다. 서울 한복판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청량한 풍광이다. 겸재 정선의 그림 '장동팔경첩'의 배경이 된 곳 중 하나로 암반계곡에 돌다리 기린교가 보이고 계곡물이 졸졸거렸다. 옛날엔 비 오는 날이면 우레 같은 물소리가 경복궁까지 들릴 정도였다니 수성동 이름답다.


​곧바로 이어지는 서촌의 골목과 거리에도 곱게 물든 담쟁이덩굴과 단풍나무, 감나무들이 계절의 정취를 물씬 풍겼다. 켜켜이 쌓인 세월과 예술의 이야기를 품은 동네를 걸으며 윤동주 시인의 하숙집 터를 만나고 박노수미술관을 지났다. 윤동주 시인이 '별 헤는 밤'을 썼던 당시 기와 한옥은 사라지고, 다세대주택 담벼락에 '윤동주 하숙집' 안내판만 남아 있었다.


통인시장을 거쳐 효자로에 이르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온 거리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청와대 사랑채에서 경복궁역까지 이어지는 은행나무 길은 경복궁 돌담과 어우러져 여전히 아름답고 한복을 차려입은 관광객들도 여전히 많았다.



​북악산 아래 청와대와 경복궁의 위용을 안고 은행잎들이 나부끼는 거리를 걸으며 가을을 만끽하는 사람들의 표정도 가을 햇살에 빛나는 노란 은행잎처럼 밝고 환했다.


창밖 단풍을 배경으로 청와대 사랑채에 세워진 대형 크리스마스트리는 또 한 해가 저물고 있음을 말해 주며 반짝이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을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단연 고궁이 아닐까. 경복궁 안팎으로 늦가을 정취가 한껏 무르익었지만 울긋불긋 만추에 든 경복궁 향원정의 모습은 유독 더 눈길을 부여잡았다. 경복궁 북쪽 후원에 있는 육각형 2층 정자로 왕과 왕비들의 휴식처였던 향원정은 연못의 물빛과 단풍빛이 어우러져 말 그대로 비경이었다.



서울에서 숲을 만나고 형형색색 물든 도심의 만추에 취한 시간이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집 밖은 온통 가을의 절정이다. 수목들이 품고 있던 가장 예쁜 색을 토해내고 있다. 이제 곧 떠날 것을 알기에 아쉽고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참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