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에 갓 들어간 연우에게 물었었다
"학교 가보니까 어때?"
"응, 좋지. 아빠 나 우유 당번 하게 됐어"
어, 뭔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연우 입에서 귀에 익숙한, 그리고 나에게도 추억이 있던 단어
'당번'을 들을 줄이야. 호기심이 급 가동됐다.
"우유 당번은 네가 손을 든 거야, 아님 선생님이 시킨 거야?"
"내가 손들었지. 처음엔 칠판당번을 하고 싶어 손을 들었거든. 근데 너무 많은 친구들이 하고 싶다고 하는 거야. 칠판당번 한다는 친구가 많으니까 선생님이 날짜도 따로 정했어. 그래서 난 우유 당번을 한다고 했지"
연우는 신이 나서 말하기 시작했다
아빠 대화방식에 익숙한 딸에게 또 물었다.
"그럼 좋아하는 이유가 몇 개나 있어?"
"좋은 이유가 세 가지야. 첫째, 우유 당번은 날짜 정하지 않고 매일 할 수 있어서 좋고.
둘째, 우유 당번은 2명인데 나하고 옆에 있는 친구하고 하거든. 우리 둘은 친해. 그래서 좋아. 셋째, 우유가 있는 곳이 2층인데 친구들이 아무도 모르는 곳이야. 거기엔 놀이터가 있는 공원 같은 곳도 볼 수 있고, 옆에서 살짝 뛸 수 있어서 좋아"
'이야, 이 녀석이 멋진 걸 시작했네!ㅎㅎ’
당번이란 단어를 아이 입에서 듣다니 그저 신기할 뿐이다.
그런데 많은 친구들이 하고 싶었던 칠판당번보다 자신만의 재미를 찾게 해 준 우유당번을 좋아하다니.
물론 칠판당번을 자처하는 아이 역시 그 자신만의 재미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이라면 자기 다운 결론이기에 괜찮지 싶다.
다만, 휩쓸려가는 분위기에 왠지 뒤따르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아 선택한 그 행동들을 말하고 싶었다.
직장 또는 회사라는 곳은 그러한 형태가 가장 빈번하며 깊숙이 표출되는 공간 중 하나일 것이다.
효율적 조직 관리를 위해선 구성원 모두가 정해진 사내 규정대로 움직여야만 한다.
게다가 직장 내 언어란 일처리에 필요한 말이 주가 된다.
이것은 회사의 언어다.
사견이지만, 회사의 언어는 여유나 실수를 품기보단 긴장과 집중, 그로 인한 결과물을 품는 듯하다.
그러니 스트레스가 일고 퇴근길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를 모른다며 한숨 쉬곤 한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려니 주중의 시간들은 고달픈 존재가 된다.
동시에 주중의 중간인 수요일 오후 또는 목요일 오전쯤 되면,
곧 주말이 오겠구나 하며 지쳐있는 자신을 위로한다.
이게 온전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연우가 말했던 우유당번. ‘당번’이란 사전적 의미가 이렇다.
'어떤 일을 책임지고 돌보는 차례가 됨. 또는 그 차례가 된 사람'
직장 내 주어진 역할은 어쩌면 직위나 상황에 맞게 일을 해내야 할 '당번'일 수 있다.
그런데 그 일을 우유 당번처럼 느꼈던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솔직히 일을 좋아해서 즐거웠던 기억보다 일에 휩쓸려 헤어 나오지 못했던 시간들이 많았음을 고백한다.
한편으로는 좋아하는 일만 찾아다니는 게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이냐는 주위 시선에 더 위축되기도 한다.
군중의 기운은 그만큼 무겁고 호된 눈초리이다.
그런데 자꾸 연우의 우유 당번이 계속 떠오른다.
그리고 조금 부럽기도 하다.
당장 내일이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이다.
월요병이 아주 조금은 있으나, 주말이 끝나가는 아쉬움, 한 주의 시작이자 완수해야 할 업무로 뇌는 업무모드로 이미 세팅되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우유 당번이란 단어 하나가 큰일을 해줬다.
그리고 고민하게 된다.
어떤 일을 미흡하지 않게 끝내면서도 좋아하는 이유를 세 가지나 찾게 될,
우유 당번 같은 일이 내 앞에 나타날 그 묘수, 그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