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브런치글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연우야, 아빠 하나만 물어봐도 돼?”
“응. 아빠 말해봐”
“행복하다는 거 말이야. 음.. 행복이란 게 지금 행복하면 좋은 거야? 아님 숙제같이 해야 될 일을 다 하고 그다음에 행복하면 좋은 거야?”
아이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머릿속이 복잡해졌을 거다.
정신없이 노느라 엄마 아빠와 약속한 숙제를 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더 그랬다.
이윽고 답했다.
“할 일을 다 하고 행복하는 게 맞지”
아이의 답으로 부모는 잠시 승리를 만끽할만하다. 행복을 어떻게 정의 내리는지는 중요치 않다.
숙제를 해야만 행복하다는 나름의 논리가 서있는 걸 보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데 진짜 그런 걸까?
요즘의 내 머릿속은 노는 일로 가득 차 있었다.
비록 이것저것 처리해야 만하는, 어쩔 수 없는 직장인 운명 속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일을 하다가도 멍 때리고, 틈만 나면 놀고 싶어 이리저리 집중하지 못하는 나를 보게 된다.
쌓여가는 일로 마음이 다급해질 때 면,
‘휴, 어서 끝내버리자. 몇 시간만 집중해서!’
스스로를 채근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다가 다시 생각한다.
이렇게 좋은 날씨와 녹음의 자연이 사무실 바로 밖에 있는데 지금 놀지 않으면 언제 놀지?
늘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의 균형에서 갈등이 지속된다.
이런 처지가 직장인의 숙명인가?
사무실 동료 한 명과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그는 광주라는 도시와 연고가 없었던 단신 부임자(홀로 부임한 사람)였다.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이 수도권에 있다 보니
금요일이면 한 시간 일찍 나서고 월요일이면 한 시간 늦게 출근하는 유연 근무제 대상자이기도 했다.
말이야 쉽지 매주 서울과 광주를 오고 가는 그 고충이 여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진정한 휴식은 가족과 함께하는 주말이라고 했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래도 광주에서 나고 자란 나로선 이 지역의 아름다움을 더 만끽할 기회를 갖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여기선 일을 끝내는 게 우선이고, 편한 집에서나 쉬어야죠. 그게 저의 행복이에요”
“주중에 있는 시간이 너무 아깝잖아요. 행복을 미룰 필요가 있나요?”
허걱!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결국 놀고 싶어 하는 요즘의 내 생각들이 갑자기 튀어나와 버렸다.
지금 놀아야 한다는, 어쩌다 보니 자기 세뇌를 하던 사고가 회사 동료를 통해 문장이 되어버렸다.
‘행복은 미루지 않는다.’
몸담고 있는 조직과 나는 고용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이다.
그런 와중에 ‘놀아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왠지 불경스럽고 죄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고용 계약 하에 직장인이란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절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나 자체를 존중해주고 싶고,
사랑스러운 인격체가 되어주길 바라는 성질은 일에 매몰되어 가는 나와 여지없이 충돌하게 된다.
솔직히 나에겐 그런 경험이 많았다.
비록 ‘일’을 하게 됨으로써 밥벌이가 해결되는 사실을 도저히 떨쳐내기 어렵지만,
인간의 본성을 일깨울 쉼도 없이 일에 매몰되어간다면 그건 사람이 아닌 기계일 뿐이다.
쉼이 부족할수록, 일에 떠밀리듯 시간이 흐를수록 하루라는 존재는 희미해진다.
보라, 하루 일을 시작하려는 출근길, 어느새 일과가 끝난 퇴근길에서 하루라는 시간과 삶이 어떻게 증발되어 버렸는지.
모두가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
주말 이틀을 위해 주중 오일을 증발시키는 삶이 옳은 것일까.
시간만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문 밖에 ‘저 있어요’ 노크하던 행복이
결국엔 그냥 돌아가 버릴 상황이 수차례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
문 밖에서 노크해 대는 행복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는 나에게도 숙제다.
작게는 멍 때리며 지내다가 문득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며 하늘을 쳐다보다 마주할지도 모른다.
사무실 천장이나 컴퓨터 모니터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니까.
할 일을 다 하고서 행복을 맞이해야겠다고 말하는 딸의 고뇌(?)에 머리가 잠시 복잡해진다.
그게 부모로선 편할지 모르겠다.
가족과 만나는 주말이 기다려지며 그 주말까진 행복을 미뤄둔다는 직장 동료의 말도 이해가 된다.
그런데 내 감성엔 문 밖에 쪼그려 앉아있을 ‘행복이’를 언제든지 안으로 들여오고 싶다.
아니 더 자주, 더 많이 마주하고 싶다.
그게 학교이든, 직장이든, 내가 서있는 어디에서든 말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희미해지거나 증발해버렸던 ‘하루’라는 삶이 돌아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