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새벽 핸드폰 충전 단자가 고장 났다. 12% 배터리가 남아있었고 어떤 케이블을 꼽아도 충전이 되지 않았다. 하루 폰 없는 기분으로 살아도 나쁠 것 같지 않아 며칠 그대로 둘까 싶었지만, 삼십 분쯤 지나자 생각이 바뀌었다. 갑자기 오랫동안 연락 없이 지내던 그리운 사람들이 내게 전화를 걸어 '전원이 꺼져있습니다'라는 안내 멘트를 듣고 생사를 걱정할 수도 있다는 이타적 연민과
쓰는 글이 야시이다 보니 '체험 삶의 현장' 스와핑 그룹 편으로 돌진해 남자들과 며칠 처박혀 사지의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체액과 정액, 풀린 눈으로 색탐에 절어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겠다는 야릇한 상상이 들자 약간 미간이 흔들렸다. 눈 밑이 푹푹 꺼져 다음 약속 장소에 나타나면 모두 내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지는 않을까 하는.
혼자 낄낄거리다 이내 집에서 한 발자국만 나서도 전화기 없이 어느 곳에도 갈 수 없다는 고립감이 선선한 방 안의 공기를 압도했다. 워낙 기계 만지는 걸 좋아해 분해했다 조립하는 걸 한 시간 가량 했지만, 부품이 문제였다.
정말 이상도 하지. 30분 전 밥을 먹을 때도 충전 중이라는 번개 모양이 액정에 당차게 깜박거리고 있었는데, 집에 오는 동안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
아무튼 다음날엔 좀 느긋하게 움직였다. 마치 전화기가 없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멘털의 소유자라도 돼 듯. 집 부근 전날 검색해뒀던 상가로 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땐 약간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핸드폰 수리라고 적혀있는 쇠문은 닫혀있었고 몇 바퀴 돌며 그곳을 배회한 후 옆의 약국에 수리점 영업시간을 물었을 때, 한 달 전부터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는 약사의 공허하고 짜증 섞인 소리가 들렸다. 맹아가 된 것 같았다. 이 드넓은 서울에서 스마트폰 없이 어떻게 수리점을 찾는단 말이야.
사거리 유동인구가 많은 곳으로 방향을 틀었을 때, 핸드폰 수리, 중고폰 매입이라고 쓰인 현수막을 보고 나서야 번화가니 ' 수리점 몇 곳은 있겠지' 하며 안도했다.
그런데, 이거 수상하다. 4층 계단까지 꾸역꾸역 걸어 올라가 보니 전당포 간판 외에는 보이는 게 따로 없었다. 다른 건물인가 싶어 내려가려는데, 대각선 방향에 핸드폰 수리라는 작은 입간판이 보인다. 가리키는 곳은 전당포 쪽이었다.
담배연기가 뿌연 전당포에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80년대 장사가 안 되는 시장 구석에서 금목걸이를 하고 한량처럼 누워있는 스포츠머리가 바로 연상됐다. 그는 다인 소파에 벌러덩 누워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아하니 며칠 사람이 얼씬하지 않은 듯한 권태로움 같은 게 스포츠 채널의 공허한 함성에서 전해져 왔다.
폰을 고치러 왔다고 말하자 그는 절대 허술한 금방의 금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뒤적거리며 부속을 찾는다. 그런데, 어제 나는 핸드폰을 조립하느라 안의 부속을 반쯤 꺼내놓은 상태였다. 끈끈이 테이프에 살짝 붙여놓아 순서대로 조립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는데도, 남자는 인상을 쓰며 이런 상태로 가져오면 어떻게 하느냐 역정을 냈다. 아니, 조립하고 분해하는 사람이 저런 문제로 화를 내야 할까 싶다가도 고장 원인을 찾지 못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감정을 조금 억눌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거 옛날 기종이라 부품이 없어요.
그런다. 그래 지금 아이폰 x가 나오는 세상인데 5s를 들고 갔으니 그럴 수 있지. 그래서 의뢰했던 배터리, 충전단자 둘 다 없냐고 물었더니 배터리만 없다고 한다. 당장 내가 필요했던 건 충전 단자였기 때문에 제안을 하나 했다.
배터리는 그냥 두시고 충전 단자만 제게 부품으로 파실래요?
그 허술한 금방의 유리 구멍으로 나와 소통하던 남자는 갑자기 바깥으로 고장 난 듯한 금고문을 열고 나와 티브이 앞에 앉더니 아무 말이 없다. 이 무슨 시추에이션? 하며 2,3분가량 남자를 쳐다봤다.
왜 말씀이 없으세요?
안 팔아요.
네?
부품만 따로 안 판다고요.
아, 그럼 고쳐주세요. 저는 제가 조립을 할 수 있으니까 그랬죠. 아까 충전 단자는 있다고 하셨잖아요.
아니에요. 안 팔래요.
이럴 때 표정은 니미 ㅆㅂ이지만, 제법 필터링을 잘해 품위 있게 얘기한다.
가능할지 여쭤봐썬 거고요. 그럼 수리해 주세요.
한 1분간 아저씨는 티브이만 쳐다봤고 나는 아저씨만 쳐다봤다. 티브이 속 경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함성이 점차 고조됐지만 황당한 아저씨는 점점 내겐 낯선 외계인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맨 인 블랙에서 뒤통수를 치면 눈깔이 툭 튀어나오는 외계인이나 소통이 안 되는 신비한 생물체와 마주한 것 같았다. 만약 무언가
튀어나온다면 말 안 듣다 맞아 죽은 사춘기 소녀 유령 정도.
잠시 뒤, 그는 내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티브이를 응시한 채 말했다.
그럼 2만 원에 사실래요?
나는 네 그럴게요. 라며 부지런히 주머니에서 현금을 꺼냈다. 이런 상황에 카드를 내밀면 아구창이 날아올 것 같은 불안감이 감지됐고 살짝 존 내 손이 현금 주머니로 날 인도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부품을 받았을 때, 뭔가 이상했다. 굉장히 지저분한 먼지가 부품에 가득 껴있었다. 그래, 내가 새것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중고인 줄 알아볼 수 없게 깨끗이 닦아라도 놨어야지. 흐르릉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내 폰은 5s고 집에 잠자는 5가 하나 더 있다. 자세히 보니 그 충전 단자는 5 용이었다. 아주 비슷하게 생겼지만, 본체 연결 케이블의 두께가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지만 다르다.
이거 5 용인 데요 사장님
아닌데요?
내 손에 들린 부품을 가져가 확인을 하자 그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부품이 쌓여있던 봉투에 5s가 아닌, 5 라 적힌 글씨를 확인한다.
하아. 사실 집 근처라 굉장히 꾸리꾸리 한 모습으로 동네용 쑥색 잠바를 걸친 채 청학동 동자처럼 질끈 묶고 집을 나선 터라 금목걸이 남자와 벌반 행색으로는 나을 게 없었지만, 돈 2만 원에 생사를 다투기라도 하듯 꼴이 아주 우스웠다. 한 번은 그가 승기를 들었다, 이번엔 내가 승기를 가져온 참이었다.
그의 초라한 태도로 난 또 점점 콧대가 높아졌다.
이거 가져갔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좀 보고 판매를 하시죠.
결국엔 이긴 것도 고친 것도 없는 이상한 기싸움만 한 채 다시 거리로 나왔고 많이 멀지만 대형 상가로 가 배터리와 충전 단자를 고쳤는데, 역시나 전화기에 전원이 들어왔을 땐 별반 연락이 없었다.
부재중 전화, 문자를 확인했지만, 광고 메시지 말고는 찾는 이가 없었다. 그간 잠적하며 지내며 지인의 안부를 걱정한 적 없는 내 태도도 반성이 되었지만 외롭더라.
어쩌면 상백수 차림의 초라한 몰골을 이끌고 너무 먼 곳까지 다녀온 탓이었는지도 모르지만, 혼자라는 건 그렇다.
그간 연애를 할 때 자기의 일처럼 모든 일을 같이 해주던 사람들도 잠깐 떠올랐다.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글밭에 처박혀서 청춘 섞어가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이제 첫 수확이라고 하기엔 4년만.
글쟁이는 주변인들에겐 참 피곤한 족속이다.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더더욱 그럴 테지. 그래도 다들 이게 좋다고 말이야.
4년 전에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