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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미한 소리 Sep 06. 2024

가을의 신호를 만나다

 지난 월요일 오후 아내와 동네 산책을 했습니다. 저희 옆으로 멋진 긴 바지 긴 팔 옷을 입은 한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그 사람을 본 저와 아내의 반응은 서로 달랐습니다. 저는 ‘덥겠다’이었습니다. 반바지 반 팔 옷을 입었지만 그래도 더워서 땀이 나던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아내의 반응은 ‘가을이 왔구나’이었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아내를 빤히 쳐다봤더니, 아내가 그것도 모르냐며 설명해 주었습니다. “원래 패션 피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일찍 다음 계절의 옷을 입는 거야! 가을에 어울리는 멋진 옷을 입은 사람들이 보이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구나, 하면 돼!” 


 그리고 이틀 뒤 수요일 아침에 양재천을 걸어서 출근을 하는데, 양재천으로 소풍 나온 유치원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한 팀이 아니라 무려 세 팀이나 보았습니다. 노란 모자를 쓰고 나온 유치원, 원복을 함께 입은 유치원, 자유롭게 옷을 입은 유치원, 복장과 모습은 달랐지만 모두 다 가을빛보다 더 반짝였습니다. 아이들을 보고 상쾌해진 마음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을이 왔구나!” 


 체코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 카렐 차페크는 프라하에 있는 자신의 정원을 오랫동안 가꿨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정원가의 열두 달”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차페크는 책에서 봄의 신호는 나비가 아니라 정원으로 뛰쳐나가는 정원가라고 말합니다. 아직 겨울이라고 여길 만큼 날씨가 여전히 추운 어느 날 정원에 작디작은 잎사귀 몇이 올라옵니다. 그 작은 생명들은 정원의 분위기를 하나도 바꾸지 못하고, 웬만한 사람은 알아차리기조차 못하겠지만, 정원가들은 바로 알아차리고 삽과 비료를 들고 정원으로 뛰쳐나갑니다. 이처럼 정원가는 눈과 마음을 정원에서 거두지 않기 때문에 정원에 찾아온 봄을 가장 먼저 발견합니다. 차페크의 말처럼 봄의 신호인 것이죠. 같은 의미로 패션 피플과 아이들도 가을의 신호입니다. 멋진 가을 옷을 입고 싶어서 온몸이 근질근질한 패션 피플들은 계속 가을 옷을 입을 기회만 보고 있겠죠. 그러다가 한 여름의 무더운 날씨가 조금만 내려가면 이때다 싶어서 가을 옷을 입고 외출합니다. 소풍 나온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밖에 나가서 놀고 싶고 소풍 가고 싶은 아이들 역시 조금만 기온이 내려가면 이때다 싶어서 소풍을 나옵니다. 멋지고 반짝이는 가을의 신호를 보면서, 또 다른 이들이 떠올랐습니다. 야외 수영장에서는 50분 수영 후에 꼭 10분의 휴식시간을 갖습니다. 휴식시간에 어른들은 돗자리에 앉아서 간식도 먹고 쉽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다릅니다. 시선은 수영장에 고정되어 있고, 귀는 안내방송 소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내 방송이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뛰어서 물에 풍덩 하지요. 보는 이들마저 시원하게 만드는 물놀이 신호입니다. 


 멋진 신호들을 생각하다가, 나 자신은 어떤 신호로 살고 있는지 살펴봤습니다. 시선과 마음을 거두지 못하고 집중하는 일이 무엇인지, 근질근질하면서 기다리다가 이때가 싶으면 바로 달려가게 만드는 일이 무엇일지 돌아봅니다. 안타깝게도 바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정원에 올라온 작은 잎사귀보다는 대단한 일이었으면 바라기 때문이겠죠. 가을 옷을 입는 일보다 의미 있었으면, 소풍을 나오고 수영장에 뛰어 들어가는 일보다 더 그럴듯했으면 바라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저는 그 어떤 일의 신호도 되지 못하는 것이겠죠.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눈과 마음의 시선을 두고 집중하는 일이 있으십니까? 준비, 땅 하면 바로 뛰어 달려갈 만큼 여러분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있으십니까? 이번 가을 우리도 무언가의 신호가 되어 보면 어떨까요? 멋지고 반짝이는 여러분의 가을을 응원합니다. 자! 시선을 고정하고, 달려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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