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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폐한, 아무것도 없는

호수는 커녕 세숫대야만큼의 여유도 없는

by Decenter

마음이 황폐할 땐 글을 쓸 수 없다.


글을 쓰려면 한 가지 생각을 이어나가야 하는데, 황폐한 마음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감정을 초래한 각종 사건들은 이미 무엇이었는지, 흔적조차 사라졌는데 떠나간 자리엔 남은 것이 없다. 이를테면 에너지, 생각, 긍정, 여유, 공감 같은 것들이다. 내 일상을 불행하지 않게 굴러가게 하는 받침돌들. 쌓는 데는 그리도 많은 애가 쓰이는 것들인데, 쌓일 땐 차곡차곡의 속도였다가 사라질 땐 기척조차 없다. 이미 돌아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을.


뭐가 이렇게 뿌리도 없나. 조약돌로 성을 쌓고 나서 그 성이 사라지지 않으려면 그저 요행을 바라는 수밖에 없다. 바람아 불지 마라. 파도야 오지 마라. 세찬 비야 오지 마라. 무거운 눈도 오지 마라. 온실 속 화초 마냥 존재해야 하는 조약돌 성의 운명은 그저 파리목숨이다. 이 나이에도 나의 평정은 위태롭기가 고작 파리목숨이다.


호수 같기를 바란다 했다. 아무리 큰 바위가 떨어져도 그 반향이 사라지고 나면 어느새 고요해지는 호수. 그 큰 바윗덩이도 다 삼켜내곤 여전히 평온한 호수. 참나. 호수 같은 소리 하고 있다. 호수는커녕 세숫대야만큼의 여유도 없으면서 호수를 바라는 것이 애당초 문제인 것은 아닐까.


뿌리가 없는 땅. 그간의 노력이란 게 온데간데 없어진 땅. 아니다. 아닐 것이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빠르게, 다시 채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배알도 없는 긍정을 내어본다. 그래도 가뭄진 땅은 아니지 않냐고, 절망으로 흘린 피눈물로 땅을 적셨으니 뭐라도 또 생겨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차피 실체가 없는 세계. 마음먹기에 따라 한 끗 차이일 거라고. 조물주이자 창조주가 될 수 있는 나의 황폐한 정신세계에 나는 또 무엇을 쌓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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