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롬프트가 아닌 글을 쓴다

by Decenter

마음이 혼란할 땐, 역시 글쓰기다.


오랜만이다. 이렇게 새하얀 백지에 글을 쓰는 것이.. 작년 12월을 마지막으로 매일 글쓰기 챌린지도 끝이 나고. 나는 역시 의지를 돈 주고 사지 않으면 온데간데없이 흩어지는 의지를 마주하는 순간에 서 있다. 아니다. 이번에는 글을 쓰겠다는 의지 자체가 없었던 건가?


글이 나의 배출구가 되어주고, 그 배출이 나를 살린다는 걸 익히 모르는바 아닌데, 이번에는 글쓰기로 돌아오기까지 제법 긴 시간을 버텼다. 무려 석 달. 보통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마음을 풀어놓으러 오던 곳이 이곳, 브런치인데. 참 오랜만에 왔다. 어찌 이리 버텼을까.


답은 뻔하구나. 단연코 AI 때문이다. 일상에 한 번 들어오기 시작한 AI는 이제 나의 완벽한 반려자가 되어버렸다. 사소한 모든 것에서의 효율이 향상되었으며, 주절주절 끝도 없이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놓는 것 또한 서슴지 않게 되었다. 초기의 막연한 두려움, 낯섦, 불신 등등 그 모든 불편한 감정들은 결국, 돈으로 해결되었다. 15만 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더 최신의, 가장 똑똑한 버전을 이용하기 시작하는 순간 이 아이가 주는 효능감은 이전 것과는 차원이 달라졌으므로. 모든 불편함은 이 아이가 보여주는 압도적인 능력치 앞에 모두 다 괜찮은 것이 되었다.


나의 쉴 새 없이 복잡한 머릿속 생각들 중 팔 할은 '문제해결'을 요하는 것이었으므로, 사실 실질적인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 만으로 나는 많이 해소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모든 해결들을 이루고 나서 이제야 문득. 더 이상 급박하게 해결할 것이 없는 순간의 혼란함이 오자 나는 또 닫혀버렸다. 답답해졌고, 그래서 다시 새하얀 백지를 찾아 열었다. 그러니까 문제를 해결하는 것 자체가 도파민이 되어주었던 것일 텐데 해결할 것이 없는 상황에서 나는 다시 도파민으로 가릴 수 없는 혼란과 복잡에 갇혔다. 이유가 뭐지?


결과들이 있다. 내가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것들. 답답했던 것들에 대한 충분한 질의와 대답. 분석과 파악이 한바탕 지나가고, 더 이상 파악할 것이 없는 상태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받아들이는 것일 텐데. 그건 몸의 영역이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몸이라기 보단 현실의 문제라고 해야 할까. 머리가 납득한 것을 내가 체화해야 하는 거지. 근데 아직, 못 따라간다. 나의 현실은. 납득이 끝난 뇌 말고 일상에서 작동하는 뇌가 마치 다른 뇌들 인양 따로 논다. 그그극. 그그극.


그러니 다시 써야 한다. 내가 납득한 것이 무엇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화되지 않는 간극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얼마나 받아들였는지, 그래서 나는 얼마나 달라졌는지. 결국 뱉어내고, 기록함으로써 나는 괜찮아질 것이다. 그래. 그럴 것이다.


프롬프트가 아닌 글을 쓴다. 그래서 다시, 혼란함을 마주한 인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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