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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The Five Pi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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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 공오삼이 Feb 06. 2021

기획자의 시선

H이야기

파리ㅣ인생의 회전목마



대면

연말과 연초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난 퇴사를 택하겠다. 1년을 4개로 나눠 1분기를 벚꽃으로 버티고 2분기는 여름휴가 때문에 버티고 3분기는 청계천으로 버티며 4분기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버티겠지만 연말과 연초는 죽어도 고르고 싶지 않다. 직장인이라면 모두 공감할 연말 영수증 스캔 작업과 연초 특유의 폭풍 전 고요와 같은 분위기는 두 번 세 번 겪어도 적응이 안 된다. 그나마 그 시즌에 가장 흥미로운 일은 새로운 사람이 들어온다는 사실이다. J와 나는 2018년 1분기에 처음 만났다. 그러고 보니 우리 인연이 벌써 햇수로 4년째다. 내가 이 사람과 이런 식으로 인연을 이어 나갈 거라고 상상도 못 했으니 우리가 첫 대면식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충고 좀 해줘야겠다. 

‘나중에 네 동업자가 될 운명이니 커피라도 한잔 더 사주렴.’     



적응

낯선 곳이 힘든 이유는 사람 때문이다. 저마다 다른 이유로 ‘처음’을 힘들어하겠지만 내 생각엔 사람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학생 때는 같이 급식 먹을 친구를 만들고 체육시간에 뭉칠 무리에 들어가고자 애를 썼다면 회사에서는 친구를 사귀지 않고 무리에 끼지 않으려 애를 쓴다. 월급 주는 회사가 그렇듯 연초에 모든 업무가 뒤집혔고 J는 내가 진행하던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인수인계를 해주는 입장이 되고 보니 나는 설명을 썩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본디 성격이 무던하고 살갑지 못해 설명은 더욱 딱딱해졌다. 

‘선배가 절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J가 나중에 말하길 내가 냉정해 보였단다.
‘아니야. 난 아무 생각이 없었어.’

아마 그때부터 나의 마음은 회사 밖을 향하고 있었을 거다. 점심도 혼자 먹고 (우리 팀 풍조가 혼밥, 혼식이었다) 틈만 나면 이직 정보를 찾아보고 인터뷰 일정을 잡던 방황의 시기에 새로 들어온 사람한테 관심이 갈 리가 없지 않은가! 어느 날 우연히 J가 찍은 사진을 봤다. 따뜻했다. 자연스러웠고 생기가 흘렀다. 사진 잘 찍는 사람은 인스타그램에만 사는 줄 알았는데 내 곁에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때부터 관심이 생겼다. 언젠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해보면 재밌지 않을까 생각하며 속으로는 이미 회사도 세우고 상장도 했다.     



유대

우린 둘 다 아침을 좋아했다. J는 원체 부지런하고 꼼꼼한 성격이라 필연적 아침형 인간이었고 나는 해가 떠 있을 때만 집중할 수 있어 어쩔 수없이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 숙명적 아침형 인간이었지만 어쨌든 우리 둘 다 아침 아니, 새벽시간 활용에 관심이 많았다.  솔직히 J가 몇 년생인지 아직도 모른다. 나이가 뭐가 중요할까 사회에서 만나면 위아래로 한두 살은 다 친구다. 

보통 큰 행사를 치르고 나면 끈끈한 무언가가 생겨난다. 그냥 옆자리 팀원에서 진짜 동료가 되기 마련이다. J가 맡은 사업 중 연말에 치르는 연례행사가 있었고 온 팀원이 뛰어들어 도와야 하는 크고 작은 업무가 많았다. 종종 함께 야근하고 휴일에도 나와야 하는 일이었다. 아마 그때 뭔가 생긴 것 같다. 술 몇 번 마시며 친해진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우리는 리트머스 종이가 붉게 물들듯 점차 가까워졌다.




조우

한국으로 돌아와 1년 만에 만난 J는 퇴사를 앞두고 있었다. 첫 입사 때나 퇴사를 앞두고서나 여전히 조심스럽고 신중했으며 본인의 능력을 잘 모르고 있는 듯했다. 짧은 조우는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았다. 먼저 퇴사한 내가 선배랍시고 해 줄 수 있는 조언과 충고 그리고 참견까지 늘어놓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사이 공통점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밥을 먹고 들어간 카페에서 본격적인 티키타카가 오갔다. 일단, 우리는 커피맛만큼 공간이 중요했고 공간만큼 그 안을 채우는 것들 – 향기, 음악, 가구, 조명 – 이 중요했다. 우린 동네서점도 좋아했고 남들은 가지 않는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도 좋아했다.      



갈증

결국 일을 벌였다. 어느 날 저녁 감바스에 와인 한잔 마시다가 취향과 공간 이야기가 또 등장했고 우리는 입을 모아 말했다. 

'우리 뭔가 해야겠어' 
'같이 글을 써보자'

알코올과 흥분으로 점철된 첫 번째 기획회의에서 아침형 인간 둘은 합체했다. 두 번째 기획회의에서  우리는 카페만 두 군데를 갔고 블루보틀에서 계획을 세웠고 브런치카페에서 주제를 정했다. 세 번째 기획회의에서 나는 J에게 핸드드립 세트를 네 번째 기획회의에서 J는 나에게 인센스 스틱을 선물하면서 정말로 루비콘 강을 건너버렸다. 드디어 취향을 공유한 것이다! 이제는 무를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정말로 함께 아침이라는 취향을 만들게 되었다.


5시 32분은 시간이자 공간이고 나와 J의 취향이자 욕심이다. 



H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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