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안아줄 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니 May 06. 2022

향연


향연  / 김혜진

 

논두렁 사이

문 드러 썩어가는 늙은 호박 하나를

물끄러미 나는 보고 있다.


한때는 꽃 모자 노란 왕관을 쓰고

데치고 삶아 먹어도 좋을

연한 잎을 내었지


논고랑 물고를 트러 간 날

제법 통통해진 살집으로 발걸음을 세우더니

죽이든 떡이든 부침이든

날 잡아 축제를 하라 했다


즐길 줄 모르는 일상에서

나는 권태롭게 살다 

너를 잊었는데


한참을 기다리다

스스로 선택한 길은


두려움 없이

단단하고 두꺼운 외피를 열어

대지 앞에 발가벗고 

완숙해진 속살을 드러내는 일


자신을 필요로 하는 생명으로부터

기꺼이 사라지기로 했지


너의 모든 삶을 베풀고

씨앗과 살점을 도려주며

한 끼를 대접하기로 했지



매거진의 이전글 개나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