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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Mar 25. 2023

<남사스러운 에곤실레 따라 하기>

<아티스트웨이 실행에 옮기기>


<남사스러운 에곤실레>




오스트리아의 화가. 클림트의  표현주의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공포와 불안에 떠는 인간의 육체를 묘사하고 성적인 욕망을 주제로 다루어 20세기 초 빈에서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다.  <죽음과 소녀>는 실레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친구이자 피후견인이었던 에곤 실레는 클림트의 표현주의 적인 선들을 더욱 발전시켜 공포와 불안에 떠는 인간의 육체를 묘사하고,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주제로 다룸으로써, 20세기 초 빈에서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다.  빈 공간을 배경으로 툭툭 튀어나온 뼈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앙상하게 마르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한 실레의 자화상은 고뇌하는 미술가 신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것은 그의 작품의 어느 일면일 뿐이다.  실레의 도시 풍경 황들은 역동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파로 넘쳐나는 도시 모습의 이면에는 어떤 긴장감이 감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실레가 느린 장인의 초상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그린 초상화들은 감정이입의 표현이 훌륭하며, 가장 뛰어난 초상화 작품들에 속한다.


실레는 열여섯 살에 빈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지만, 그곳의 교육이 케케묵고 인습적이라고 생각되어 곧 그만두었다.  그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신미술가 협회'를 창립했다. 그 후 그는 여인들과 소녀들의 누드화를 적나라할 정도로 솔직하고 생생하게 묘사한 드로잉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드로잉들은 실레가 크루마우로 이주한 후인 1911년에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모델이자 동거녀였던 발레리 '발리'노이칠과의 자유분방한 생활과 미성년자들을 모델로 그린 그림들 때문에 크루마으에서 추방당하게 되었다.  노이렝바흐에서는 더욱 이해받지 못했다.  1912년 실레는 그곳에서 어린 모델들을 데려다가 부도덕적인 그림을 그렸다는 죄목으로 잠시동안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다. 


1915년 실레는 바리와의 도억생활을 청산하고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했다.  1918년이 돠자 실레는 지난 몇 년간에 비해 훨씬 더 안정된 삶을 살게 되었다.  아내인 에디트는 임신한 상태였다.  실레는 빈 분리파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해에 사망한 클림트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 시기에 그른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며 아버지가 된다는 기대감으로 <가족>(1918)을 완성했다. 인물들의 행복한 표정이 눈에 띈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실레의 아내는 당시 유럽을 휩쓸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했고, 아내와 뱃속의 아기를 잃고 슬퍼하던 실레도 스페인 독감으로 3일 뒤에 세상을 떠났다. <네이버 참조>


시부모를 모시고 모처럼 제주도에 가족여행을 갔었다.

우리는 배를 타고 우도에 가서 놀다가 저녁을 먹기 전 괜찮은 카페가 있으면 커피 한잔을 마시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 했다.   부슬부슬 비가 오니  쉬엄쉬엄  구경하자는 의도도 있었다.  나는  딸에게 얼른 추천할 카페를 검색해  알려달라 했다.   딸은 막내 동생이 미대를 준비하니 에곤실레카페가 좋을듯하다고 말했다.  평이 좋다 하니  모두 그곳으로 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도착하니 경치는 좋을 게 없는 허허벌판에 깡마른 에곤의 자화상 간판이 크게 걸려있었다. 

부모님은 사뭇 어두운 카페분위기에 좋은 표정은 아니면서도  아무 말씀을 안 하셨다. 그리고는 창가 깊숙이  안락해 보이는 파란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카페는 작지만 하나의 미술관처럼 에곤실레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고 드로잉을 체험할 수 있도록  각종 그림도구와 미술재료들이 놓여 있었다.  나는 부모님과 마주하는 벽에 걸린 누드 자화상이  조금은 불편할 수 있을지도 몰라 얼른 자리를 바꿔 그림을 뒤로해서 앉도록 자리를 배치했다. 

누드화로 그린 자화상이 젊은 MZ세대에겐 거리낌 없이 예술작품으로 평가하며 다가갈 수 있다지만, 팔순이 다된 부모님은 19금 포르노그래피를 연상하는 그림 앞에서 남사시럽 다며 수줍은 눈살을 찌푸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기 때문이다.

벽에 걸린 그림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성 누드 그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 또한 에곤실레에 대해 잘 알지 못했었다.  얼른 차와 음료를 시켜놓고 에곤실레를 검색해서 에곤실레의 생애와 작품들에 설명된 많은 글과 그림을 이미지로 보았다. 에곤실레의 그림들을 그의 생애와 함께 연관시켜 읽어보고 그것을 부모님께 읽어주며 설명해 드렸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드로잉 체험을 하기 전까지 에곤실레에 대해서는 알고 가는 것이 좋을 듯하여 비치되어 있는 책들을 가져다가 천천히 같이 넘겨보았다.

책 속의 많은 작품들 중 자화상들은 마치 좀비처럼 퀭한 눈과 깡마른 몸이 추하게 그려져 있다.  피골이 상접한 자화상에는 적나라하면서도 과감하게 자신을 대면하는 모습이 강한 인상을 준다.  거기다 보통 그림을 그릴 때 가리고 숨기는 중요 부위가 거리낌 없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며느리 앞에서 조금은 민망한지 아버님이 한 소리 하셨다. 

"그래도 그렇지 이게 뭔 예술이여!  해괴망측하게..." 하며 헛헛 웃음을 지셨다. 이 말을 들은 막내아들이

"그러니까 할아버지 우린 예술가가 못 되는 거예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용기 있고 과감하게 표출할 줄도 알아야 예술이거든요!" 하며  웃으며 말했다.   

"그래 용기?  그럼 너도 니 멋대로 한번 해봐! 미래의 화가님.  유명한 예술가가 되어 돈 많이 벌어 할아버지 집도 사주고 차도 사주고.."라고 웃으며 말했지만  에곤실레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아니 정신 나간 놈이란 표정이셨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깊은 기억, 본능, 숨겨진 무의식등은 사실 알고 보면 어린 시절과 깊은 관계가 있다.

에곤에게 있어서  특히 아버지 아돌프 실레는 많은 영향을 미친것 같다.

에곤실레는  성의 굴레에서 깊이 머물러 있으면서  그 속에 고통과 불안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꽃 피운 듯하다.

몰랐던 에곤의 삶을 알게 되면 에곤의 그림이 깊이 있게 느껴진다.  그의 그림들은 많이 불안해 보인다.  볼수록 성에 대한 두려움과 괴로움이 느껴지기도 하고, 외설스럽기도 하다.  성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어쩌면 에곤의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아버지 때문에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아버지를 에곤은 무척 좋아하고 따랐다. 역장이셨던 아버지의 아들답게 어렸을 적 그가 그린 그림이 온통 기차, 철로, 신호등이 가득했다. 아버지 아돌프 실레는 성병인 매독을 앓고 있었고, 실레의 어머니 마리에게까지 감염되어  아기가 사산되기도 했다. 1893년에는 열 살 된 누이마저 선천성 매독으로 사망했다.  아버지는 매독증세가 심해서 발작을 일으켰고, 그간 투자했던 주식과 채권 모두를 태워버리는 어이없는 일을 저지른 후 아버지는 사망했다.  부유했던 그 가족의 전 재산은 그렇게 불속에서 다 타버린 것이다. 여기서부터 꼬여버린 에곤의 인생은  너무나 짧고 아쉽다. 

12년의 짧은 기간 동안 평생 100여 점 이상의 자화상, 유화 300점 드로잉 2000점을 남긴 에곤 실레는 성에 대한 불안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글이 아닌 그림으로 그리고 또 그렸나 보다.  

여행을 통해 훌륭한 천재 화가 에곤실레를 알게 되었고 잠시나마 에곤실레 매력에 취해 있었다.  집에 돌아와 에곤실레의 영화 <욕망이 그린그림>을 감상하고 도서관에서 에곤실레의 몇 권의 책들도 빌려 읽었다. 

그리고는 시간이 지났고, 천재화가의 드로잉 작품 중  "Old Gabled House in Krumau" (1917년)에 그린 그림을 드로잉 수업에 따라 그려 보았다.   쉬워 보여 따라 그려보았는데 구도가 쉽진 않다.  

드로잉의 천재를 조금이나마 만나보는 색다른 시간이었다.   구도를 잡고 색깔을 입히니 더 그럴싸하게 느껴진다.  습작으로 치부되는 드로잉을 예술 작품으로 여겨지도록 인식의 전환을 이끌어낸 에곤실레 덕에 나의 아티스트 수업은 오늘도 빛을 발한다.


예술이 별 건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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