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놈의 자식

<#2 그래도 남편밖에 없어>

by 지니


추석명절 일주일 전이기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택배가 더 자주 오는 것 같다.

“오늘도 두 박스나? 부피가 이리 큰 박스네! 뭐지?”

“아. 내가 시켰어. 놔둬!” 하며 남편은 마저 하던 일들이 있는지 소리를 지른 후 금 새 방으로 들어갔다. 이틀이 지나도 현관문 앞에 놓인 박스를 개봉하지 않자, 정리하고픈 마음에 칼로 테이프를 자른 후 박스를 열었다.


비닐로 덮여 있는 하늘색 수건 20장과 흰색 수건 20장이 나왔다. 그리고 다른 박스도 열어보니 아연과 비타민이 첨가된 영양제 4박스가 나왔다.

아니 이게 다 뭐야?

마침 방에서 나온 남편에게 물으니,

“어! 어머니 욕실 수건이 너무 낡은 것 같아서 주문했고, 영양제는 형제들 선물 주려고 준비했어”

디테일의 극치다. 아들의 눈으로 수건의 오래됨을 파악하고 사드리는 저 큰 아들의 디테일.

“형제? 어느 쪽 형제? 내 말을 못 들었는지 아니면 듣고도 모른 체하는 것인지 말도 없이 남편은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준다면 시댁 인듯하다. 시댁은 3형제, 친정은 5형제니 친정 쪽은 개수는 맞질 않는다.

“그럼 친정 식군?” 어쨌든 친정 식구 것은 포함되지 않은 게다.

‘아니 자신의 형제만 형제인가!’ 그깟 선물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기가 막혔다. 24년을 살고도 아직도 자기 형제만 생각하는 그 본능이 짜증이 났다.

‘자신의 친 형제만 생각하고 내 형제는?’

‘따져 뭘 해... 생각이 없냐고? 당신 형제만 형제고 내 형젠 남이야? 양심 좀 있어라.’

‘방금 전 먹었던 당신이 좋아하는 총각김치가 칠순인 우리 엄마가 담아 주신 거고, 어제 당신이 낸 차사고로 인해 차가 없어 난처할 때, 아들 학원을 급하게 대신 데려다준 것도 내 동생이고, 지난주에 딸 졸업했다고 용돈을 두둑이 준 것도 우리 언니고, 지난주 먹어본 커피 중 가장 맛있다는 그 커피. 정성스레 로스팅 해준 사람이 우리 오빠란 말여! 당신은 그렇게 받고도 왜 자연스럽게 내 친정식구는 생각을 못하는 거지?’


씻으러 들어간 남편 뒤통수에 말을 하려다 묻지도 따지고 싶지도 않아 아무 말하지 않았다.

‘말해 뭐해’ 생각을 못해서이지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니 좀 참자.

하지만 계속 생각하니 부야 가 났다. 남편이 씻고 있는 사이 나는 박박 그릇을 닦고 청소기를 탁탁거리며 바닥을 문질렀다. 살을 맞대고 살아도 마음 씀씀이가 다른 마음이라는 것이 서운함을 넘어 자꾸만 화가 났다.

“부모 형제 몰라보면 상놈의 자식”이라고 어린 시절 친정아버지가 얘기했었는데...

자기 쪽 부모형제에만 알아본다는 생각에 ‘그래! 팔이 안으로 굽지 바깥으로는 안 되지! 부부도 남인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사이 남편은 씻고 나와 평상시처럼 차가운 바람을 켜고 드라이로 머리를 말린다.

나는 남편 옆에 가서 의자에 걸터앉았다. 감정을 억누르면서 얘기하자니 나만 느낄 수 있는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었다. 당신 친정에...

말을 내뱉는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울린다.

“응 엄마야. 권서방이 선물 보냈더라! 많이도 보냈구먼... 고맙다고 잘 받았다고... 권서방 있어?”

“아. 엄마. 알았어요. 막 씻고 나와서 나중에 전화드리라 할게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나는 얼른 전화를 끊고서 미안하기도 하고 어쩔 줄 몰랐다.

짜증 났던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휴 심호흡으로 한숨을 돌렸다.

“왜? 전화를 안 바꿔줘 어머니 같구먼...”

나는 내 생각과 내 행동이 바보같이 우스워서 웃음이 나왔다.

“당신 양반이구나? 부모형제도 알아보고...”

“뭔 소리야?” 하며 나를 쳐다본다.

“당신은 아무리 봐도 상놈이 아니라 뼈대가 깊은 양반집 자제 같다고 흐흐흐”

영문도 모른 채 남편은 무슨 뜬금없는 소릴 하는지 어이없어한다.

내가 어릴 때 살던 앞집 성철 아저씨네는 탱자나무로 울타리가 동그랗게 쳐 있었다.

아저씨는 늙으신 어머니와 결혼 안 한 동생을 데리고 있었는데 자주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형제가 크게 싸울 때면, 직접 가서 싸움에 말리고 오거나 소리가 들리면 혀를 차며 말씀하셨다.

‘부모 형제도 몰라보면 상놈의 자식이여!’라고 내뱉곤 하셨는데 5남매인 우리 형제를 향해서인지 아저씨네를 향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때는 쉽게 흘려들었던 말이다.

“지금 세상에 양반과 상놈이 어딨어요!”라고 엄마가 한마디 건네면, 아버지는 구석 한편에 낡고 오래 묵혀둔 한자들로 뒤덮인 족보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지금의 나도 무의식 속에 도덕적 개념을, 그냥 양반과 상놈이라는 단어를 빌어 구분 짓는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잠깐이지만, 짧은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추석선물 사건’은 남편에게 미안함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할 말은 좀 하고 살자! 진작 말했으면 그 짧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맘고생은 안 할 텐데!’ 아니 오히려 내가 더더더더 잘 챙겼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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