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에게 모멸감을 주었어!

by 지니


신념만 가지고 따르는 것은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과 같다

-벤자민 프랭클린-


고등학교 시절 나는 의협심과 나름 책임감이 강한 아이였다.

그래서 3년 동안 선도부 생활을 했었다.

선도부라는 것이 지금은 없어졌지만 학교에서, 구성원들이 교칙이나 단체의 규칙을 잘 지키도록 감독하는 부서이다.

그래서 교우들에게 규칙을 앞장서서 이끌거나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반에서도 예외 없이 소위 좀 논다는 아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고자 선생님은 노는 아이들 뒷자리 틈에 나의 자리를 배정하였다. 물론 내가 키가 작지 않은 이유도 있긴 하다.

수업시간에 어떤 수업을 하는지, 준비물과 과제는 무엇인지 주변 아이들에게 귀 뜸 해주기도 하고 분위기가 흐려질 때 좀 조용히 하자라든가 집중할 수 있는 언질의 의사들을 표현하였다.

어쨌든 고등학교 3년은 빨리 지나갔다.

나는 서울로 대학을 왔다.

낯선 서울의 생활에서 환경이 바뀌었고 친구들을 금방 사귄 것도 아니어서, 향수병에 걸린 사람처럼 기차를 타고 매주 엄마를 보러 집으로 갔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금요일 저녁이라 자연스럽게 차표를 끊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나를 툭툭 쳤다. 뒤로 고개를 돌아보니 고등학교 동창 미령이었다.

미령이는 고2 때 잠시 짝꿍이었고, 소위 논다는 친구 중에서 가장 약하고, 노는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 사이에서 제대로 끼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며 학교생활을 했던 아이였다.

이 넓은 서울 땅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다니 처음 고향을 떠나온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잠깐이었지만 우리는 낯선 곳에서 살아가는 이야기, 그리고 각자의 처지를 얘기하며 또 다른 시간을 내어 만나자고 약속을 하며 헤어졌다.

다시 만난 미령이는 본인은 서울로 올라와 고속버스터미널 앞에 위치한 작은 무역회사에서 경리 일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학창 시절 선생님의 특징이나 각자가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들의 안부를 얘기하며 즐거운 수다를 쏟아냈다.

내게 '남자 친구 있냐고 묻자 없다는 대답'에 본인은 남자 친구가 있는데 같이 만나자고 했다. 내가 확실하게 대답을 하지 않자 미령이는 재촉했다.

“야. 너처럼 지적인 내 친구가 있다는 것을 남자 친구에게 자랑하고 싶어!. 시간 좀 내줘라!”

“웬 지적? 지적인 여자 다 죽었네! 알았어. 내가 어떤 놈인지 한번 봐주지!”

낯선 남자를 만난다는 게 썩 내키진 않았지만, 그래도 부탁이니 들어주어야 할 것 같아서 고속터미널 역 앞에서 금요일에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날 입학 기념으로 언니가 사준 연한 하늘색 캐주얼 정장 투피스를 입었다. 청바지가 편하지만 그래도 초면이니 정숙하고 단정해야 할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미령이는 약속시간보다 십오 분이 지난 후 나타났다. 그런데도 미안 하단 사과 없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만난 것에 어찌나 반가워하는지 내가 기다린 사실을 잊어버리게 했다.

남자 친구를 만난다니 한껏 멋을 부린 티가 났다.

진한 파랑 리넨 재킷에 짧은 흰색 미니스커트. 하지만 다리가 예쁘다는 생각보다는 야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시외버스 한 대가 정차하자 갑자기 미령이는 내 손을 잡더니 급히 버스를 탔다.

“미안 내 친구 군인이야. 그래서 오늘은 내가 가야 할 것 같아. 같이 가자!”라며 말했다. 얼떨결에 버스에 올라탄 나는 황당해서

“진작 말을 하지. 놀랬잖아! 옷차림도 불편한데. 차로 얼마나 가니?”

미령이는 흔들거리는 버스에 귀찮은 듯“어! 어!”라고 대꾸만 했다.

버스 안에서 다시 묻기도 계면쩍어 잠자코 창밖만 바라보며 꽤 한참을 갔다.

시외버스는 시골길로 들어가더니 먼지를 내며 군부대 앞에서 멈췄다.

정류장에 도착하니 낯선 길 한복판에서 키 작은 군인 한 명이 걸어온다.

벌써 만나기로 이미 약속이 되었나 보다.

미령이는 근처의 작은 커피숍으로 데려가 서로 인사를 시켜줬다.

모자를 벗으니 얼굴 윤곽이 더 확실하게 드러났다. 생김새가 널찍하니 이마가 넓어 시원스러워 보이면서 입이 굉장히 큰 얼굴이다.

둘은 만나서 기분이 좋은지 목소리가 들떠있는 것 같았다.

우린 짧게 인사하며 상식적인 이야기가 몇 마디 오고 가고,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친구들의 이야기와 군 생활에 대한 얘기들을 한참 떠들었다.

정말 '아무 말 투머치 토커'라고 해야 하나!

처음에는 나를 의식하며 말을 조심하는 것 같더니 맥주 한 두병을 시켜 마시고 난 후부터는 나이트클럽에서 둘이 만난 이야기며 군에서 생활하는 동료들 이야기로 한참을 떠들었다.

대화는 욕설이 자연스럽게 뒤섞이더니 너무 가벼워 사방으로 흩어져 담배연기와 함께 날아다녔다.

나는 식상해지며 슬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졌다. 남자 친구가 화장실에 간 사이


“미령아 집에 가자.! 나 집에 가서 쉬고 싶어!”

“아, 지금 몇 시야? 여긴 시골이라 9시면 버스가 끊어지는데 오늘 힘들겠다......... 아 어쩌지!”라며 시계를 본다.

미령인 차 시간을 미리 체크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연거푸 해대며 어쩔 줄 몰라했다. “대신 내일 꼭 6시 첫차를 타고 가자!”라고 말한다.

내가 먼저 체크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나를 탓하며, "할 수 없지 뭐!"라고 받아들이며 오늘은 집에 가기를 포기했다.

미령인 근처의 여관방을 하나 얻자 했고 우린 방을 하나 잡았다.

여관방은 허름하고 지저분한 곳이었지만, 몇 시간만 참으면 된다는 생각에 마음을 가라 앉혔다. 그리고 대충 얼굴만 씻고는 슈퍼에서 사 온 맥주와 술안주인 문어발을 찢어 하나씩 나눠 먹었다.

시간이 갈수록 피곤이 몰려와 나는 잠깐 눕는다는 것이 깜박 잠이 들었다.

그러다 작은 신음과 소곤거리며 웃는 소리에 눈을 떴다.


“쟤가 무슨 친구야! 쟤 샌님이지. 하자는 대로 다해. 차 끊어졌다 하니 그냥 믿더라고 병신같이. 오늘 내가 여기 오는 것도 모르고 따라왔어!”

“정말? 내가 봐도 꽉 막힌년이던데, 근데 왜 데려왔어?”

“혼자 오려니 심심하잖아. 그래서. 쟤는 심심풀이 땅콩으로ㅎㅎ”

순간 심장이 멎고 눈앞이 하얘졌다.

나는 순간 정신을 가다듬고 자는 척 일정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순간 짓이겨진 가슴이 쿵쾅거렸다. 다음에는 무슨 말이 나올지 가슴이 타들어갔다.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끼면서 내가 지금 얼마나 위험하고 무모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당나귀처럼 커진 귀를 가지고 나의 몸은 폼페이의 유적에서 볼 수 있는 화석이 되어 버렸다.

거의 공기와 접촉하지 않아 순간 뒤덮은 화산재가 있고 대기 중에 떠다니는 미생물들이 시신을 분해할 기회를 갖지 못해 최후의 순간이 생생하게 살아남아 있는 폼페이의 화석.

다리 근육을 감싼 나의 표피가 꼼짝달싹 못하게 묶어버렸다.

그리고는 믿음과 신뢰라는 말이 방안을 떠도는 허공의 무게만큼 나를 짓눌렀다.

그리고 잠을 자지 않고 눈을 감은 채 밤을 새웠다.


아침 6시가 다 되어, 나는 깊은 잠에 빠진 친구를 뒤로 조용히 나와 혼자 버스를 탔다. 그 이후로 나는 미령이를 만난 적도 누구에게 미령이 소식을 물은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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