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진짜 아군도 적군도, 없다.

"무너지는 안식처"

by 혜랑

나는 회사가 남편이 채워주지 못한 부분을 대신 메워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은 나의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앞서 얘기했듯이 겨우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과한 업무량에 버거워도 견디고 버텼던 것은 이곳에서의 인정에 목이 말랐기 때문일 거다.

여기 사람들은 나를 잘 알고 나를 이해한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이 터졌다.


오래된 동료와의 마찰이었다.

동등한 관계라고 생각했고, 얼마든지 의견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관계에 있어 불편하거나 부당하다고 느끼는 점이 있으면 이전에도 대화로 해결했었다.

그래서 점차 동등하지 않아 지는 상황에 대해 한참 고민 끝에 의견을 냈다.

그러나 동료는 자신의 일방적인 상하적 관계형성에 내 책임이 크다고 했다.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내 기준이 동료와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나친 의견은 어느새 지시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동등했던 관계는 상하관계로 변질되었다.

이런 상황이 그렇다고 딱히 다 동료의 잘못이라고 볼 순 없다.

회사가 힘든 시기이기에 여러 가지 흔들리는 상황들이 벌어졌을 뿐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렇게 넓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그 이후, 좋은 마음으로 낸 의견이 큰 오해가 된 일이 겹쳤다.

오해는 퍼져나갔고, 풀고 설명하고 이해시킬 기회는 없었다.


내 의도를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변호해야 했다.

내게 고개를 돌린 동료가 맘이 풀리기를 기다려야 했다.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회사는 내가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지금껏 가보았던 곳 중 가장 깊은 곳으로 나동그라졌다.

그 충격은 마치 배신당한 이의 처절함같이 느껴졌다.


잠을 자지 못했다.

늘 두통에 진통제를 달고 살았다.

가슴이 답답해서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 시기에 안정제를 늘렸고, 손과 발의 떨림증상이 생겼다.

온몸에서 비상신호가 울렸다.


출근길엔 늘 도망치고 싶었다.

밤마다 해가 뜨지 않기를 기도했다.

우울증세는 급속도로 나빠졌다.

하지만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다는 말처럼, 그 와중에 묵묵히 곁을 지키는 이가 있었다.


남편.

남편은 이번에 단 한마디도 내 책임을 묻지 않았다.

나의 하소연을 묵묵히 들어주고, 내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같이 화를 내주지 않아도, 내 말에 귀 기울여 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결국 내 편은 미우나 고우나 남편뿐이구나.'

이때부터 남편과의 관계가 빠르게 회복되었다.

남편은 눈앞에서 무너져가는 나를 부축하고 있었다.

회사에서의 갈등이 오히려 둘 사이를 끈끈하게 해 준 것이다.


퇴사를 결정하기 직전에 동료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오랜 대화를 통해 서로의 경계선을 다시금 재정비했다.

누구도 잘못한 것은 없지만 모두 아픈 경험이었다.


상황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지만 한번 심해진 우울증은 잘 회복이 되지 않았다.

나는 치료에 집중해야 했다.

회사와 의논해 업무를 줄이고 그 시간에 심리상담을 시작했다.


두 번째 상담에서 멀어진 동료들과의 관계에 대해 말했다.

더불어 그로 인해 가까워진 남편과의 일상도 전했다.

그러자 상담선생님은 말했다.

"지금 혜랑 님은 의지의 대상이 회사에서 남편으로 옮겨간 것뿐이에요."


아!

남편도 회사도 내 주변의 일부일 뿐이었다.


나는 때론 남편과 적당한 기대와 시간을 보내며 살아가야 했고,

때로는 회사의 동료들에게 맞는 기대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래야 어느 한 곳에 의지하는 탓에 작은 바람에도 무너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우울증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나를 지키는 것은 타인의 인정이나 이해가 아니었다.

결국 내 안의 힘을 키워주는 것은 스스로의 인정과 이해였다.


상담실 밖은 시원한 가을바람과 높고 푸른 하늘이 있었다.

깊은 구덩이 안에서 저 하늘로 내딛는 한걸음이 느껴졌다.

왠지 이제는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담 선생님이 해주신 조언을 듣고 말했다.

"다음 상담 때까지 꼭 숙제를 해올게요!"

선생님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숙제가 아니에요. 그냥 삶이에요.

천천히 할 수도 있는 거예요.

느릴 수 있어요. 놓칠 수도 있어요."


음.. 아직은 조금 더 나를 돌아보고 내 주변을 돌아봐야겠다.

방향이 맞다면 속도는 느려도 상관없다.

적어도 나는, 나를 지키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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