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우울증이라는 이름의 나

"나는 우울증 환자입니다."

by 혜랑

문득 몇 년 전, 첫 정신과에서 진단을 받았던 순간이 떠오른다.

당시까지는 공식적 병명을 알진 못했다.

선생님은 간단하게 '중증 우울증'이라고 말했다.


우울증을 만난 다른 사람들은 어땠는지 잘 모른다.

다만 나의 경우는 '독감입니다.'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힘든 상황들의 이유를 알게 되었으니 해결되겠거니 생각했을 뿐이다.

처방해 준 약을 꼬박꼬박 먹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노력을 하면 나아진다고 믿었다.

나는 원래 초긍정 에너지를 가진 아이였으니까!


사실 첫 진단을 받은 그때의 나는 내가 그동안 살아온 모습이 아니었다.

밝고 명랑하고, 자신감 넘치던 아이는 자라서 여전히 밝고 행복한 여자가 되었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결혼을 했다.

곧이어 '엄마'라는 책임이 생긴 후 조금씩 균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균열도 내 탓이라는 도돌이표 같은 자책으로 결국 나는 현재의 모습을 가지게 됐다.


성격은 바뀌는 것이 아니라 했던가.

나는 때론 밝은 모습으로 우울했다.

어떤 날은 명랑하게 우울했고,

이까짓 우울증은 얼마든지 극복가능하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 좋은 성격을 가지고

우울증에 좋다 하는 것은 죄다 시도했던 것 같다.

얼마가지 않아 다 포기해 버리고,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했다.

그땐 바르지 않은 길을 달려가느라 내가 더 다치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 같다.


오늘의 나는 이제야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우울증에 걸린 나도 여전히 밝고 명랑하고 자신감 있는 나라는 걸.

우울증에 걸린 나도, 그 전의 나도 언제나 나였다는 걸.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게 진정한 회복이 아니었다.

예전의 내가 지금의 나와 다른 것은 당연한 거였다.

삶이 달라지고 가족이 생겼고 나이가 들었다.

그 사이 나는 우울증이 생겼지만 그전보다 깊이가 생겼다.

주변을 돌아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타인과 더불어 살아감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다.

나는 우울증으로 눌러앉아 있는 게 아니라 여전히 성장하는 중이었다.


과거의 나를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잘못된 게 아니라 그냥 지금 내 모습이 이러한 것이다.


우울증도 나의 한 부분이다.

우울증에 걸린 나도 충분히 사랑받고 자랑스러워도 되는 내가 맞다.

우울증은 약 먹고 잘 쉬면 낫는 '마음의 감기' 따위가 아니다.

그냥 내가 가진 여러 감정 중 하나가 좀 비중 있게 나타나는 시기.

나는 지금 내 삶의 어떠한 구간을 지나고 있을 뿐이다.


걸어야 하는구나...

내 삶을 나는 서두르지도 멈추지도 않고

그저 내게 맞는 속도로 뚜벅뚜벅 걸어가면 되는 거구나.


이제야 우울증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는 것 같다.

나는 비로소 지금의 얼굴을 인정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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