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즐거움을 찾을수록 과거의 어둠이 발목을 잡아끈다."
"하고 싶은 걸을 찾아보세요. 이제 남 눈치 보지 말고 혜랑 님만을 위한 것들을 하나씩 해봅시다."
어느 날 진료를 보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은 활발한 사람인데 주변에 대한 생각이 너무 많다고 했다.
그러니 주변을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했다.
나는 학창 시절에도 수행평가는 무조건 100점을 받던 아이였다.
의사 선생님이 내주신 '숙제'를 하면 금방 낫을 것만 같았다.
나는 하고 싶지만 미루던 것들을 하나하나 시도해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귀를 뚫었다.
노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생각해서 20대 때도 못했던 일이다.
나는 과감하게 피어싱 구멍을 뚫었다.
왠지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남편은 애 엄마가 무슨 피어싱이냐고 자신은 싫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에 더 자극을 받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남 의견 없이 결정하고 행한 그 기분이 좋았다.
피어싱은 하나, 둘 늘어갔다.
남편의 인상도 조금씩 나빠졌다.
타투도 하고 싶었다.
나만 보이는 팔 안쪽에 "I am fine."이라고 쓰고 싶었다.
불안이 올라올 때마다 그 글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혹시 나중에 후회할까 봐 고민만 계속했다.
대신 각인반지 두 개를 주문했다.
하나엔 타투로 쓰고 싶었던 "I am fine"이라 썼다.
다른 하나엔 "괜찮아"라고 쓰고 매일 끼고 다녔다.
불안이나 긴장이 훅 올라오면 손가락의 반지를 만지작 거렸다.
속으로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하면 좀 괜찮아지기도 했다.
언젠가는 독서모임에 나가게 됐다.
매주 평일 하루, 저녁 7시였다.
아이들 밥을 해주고 6시 지나 나가면 10시쯤에 돌아오곤 했다.
몇 시간 동안 커피 한잔씩을 마시며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임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내 생각에 고개를 끄떡이며 들어주는 그 시간이 귀했다.
하지만 반복되는 모임을 남편은 좋아하지 않았다.
응원하는 듯하면서도 왠지 그 시선 끝에 '무책임하다'는 비난이 느껴졌다.
진짜가 아닐 수도 있는 그 비난에 나는 움츠러들었다.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정체 없는 비난에 모임을 끊었다.
작년에는 우연히 동화책을 쓰는 것을 배울 기회가 생겼었다.
그리고 수업을 마치고 마음 맞는 몇 사람이 동호회처럼 모였다.
한 달에 한번 자신이 쓴 동화 한 편을 들고 와 서로 피드백을 해주곤 했다.
이 모임도 평일 저녁 7시지만 한 달에 한 번이라 부담이 적었다.
하지만 집에서도 글을 쓰다가 남편과 마주치면 으레 눈치가 보였다.
언젠가 '너는 너 하고 싶은 것만 하잖아.'라던 남편의 말이 신경 쓰였다.
그때 나는 '당장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귀를 뚫고 타투를 하면 갇혀있던 내가 해방될 것 같았다.
그동안 가고 싶던 다양한 모임에서 나만의 시간을 가지면 행복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스트레스를 적당히 해소하고 남는 마음의 자리에 건강한 나를 채워야 했다.
그러나 나는 어느새 '뭔가를 이루면 나아진다'는 착각을 따라 스스로를 보챘다.
마음을 들여다볼 시간도 없이 달리던 거다.
우울증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그 시작점을 찾아볼 틈도 없었다.
나는 그냥 우울한 경주마 그 자체였다.
그렇게 혼자 엉뚱한 길로 내 달리는 동안 남편과의 관계도 많이 틀어졌었다.
나는 회사에서 일도 계속 늘려갔다.
어떤 업무가 와도 거절하지 않았다.
다 하려고 했다. 출근이 9시인데 8시에 와서 미리 수업 준비를 했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세세히 살피며 얘기 나누고 맞춤수업을 하려고 했다.
당연히 회사에서는 열심히 일하는 나에게 좋은 반응을 주었다.
그럼 나는 끝없이 뭔가를 더 하고 더 감당하고 더 해내려고 했다.
그게 내가 하고 싶은 일 중 하나라고 느꼈다.
회사에서의 인정과 존중이 나의 유일한 안식처라고 느꼈으니까.
점차 회사에서 요구하는 일이 많아졌다.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가 되어도 말할 수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해 보자'는 의사 선생님의 의도는 이미 사라졌다.
나는 내가 다 감당하기도 힘든 것들을 다 해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쓸모없는 사람 같다고 느껴졌다.
이 기간 동안은 내내 험한 파도를 타는 기분이었다.
뭔가를 '할 때'는 기분이 좋다가 그게 끝나면 허무했다.
회사에서 뭔가를 '요청받았을 때'는 내 가치가 느껴져서 힘이 났다.
그러나 점점 그 양이 늘어나자 나는 급속히 지치고 스트레스에 헐떡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서 예상치 못한 일을 겪게 되었다.
험난한 파도에서 버티던 나의 유일한 안식처에서 말이다.
나는 파도 끝에서 땅바닥, 아니 지하 구덩이로 곤두박질쳤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시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