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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작 Apr 20. 2022

나만 아는 엄마

유나

엄마는 나를 질투해.

유나는 손안에서 굴리던 연필을 툭 내던졌다.


어떤 때는 그녀와 닮은 얼굴에, 그 아름다운 얼굴에 버럭 화를 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세상에 딸을 질투하는 엄마가 어디 있어! 그 연약한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져 세상의 좌절이란 좌절은 홀로 맛본 것 같은, 그녀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그 표정이 기어이 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아빠는 잊을 만하면 유나와 언니에게 '너네 엄마는 똑똑한 사람'이라고 했다. 명문 여고를 다녔고, 고교 3년 내내 우등생이었다고. 운이 나쁘게도 하필 학력 고사에서 형편없는 성적을 받았고, 할아버지가 재수를 허락하지 않아 결국 전문 대학교를 간 것 뿐이라고. 엄마는 기억력도 좋고 아는 것도 많다고. 유나는 어느 때고 그런 말을 들으면 엄마를 향한 애틋함과 존경심 따위 대신 불편한 이물감을 느꼈다. 마치 적선하는 듯한 아빠의 말투와 그런 아빠가 칭찬하는 말이 싫지 않은 양, 옆에서 가만히 미소만 짓고 있는 엄마의 표정, 그저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개를 45도 가량 내려 수줍어하는 듯한, 자매가 질색하는 그런 특유의 표정이 있다.) 마치 누구나 앓아 마땅한 홍역인 듯한 '과거사'를 아련하게 훑는 그 맥락 속에서,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부조리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딸'의 도전을 응원하지 않았던 부유한 할아버지. 유나도 겪고, 유나의 동생도 겪고, 어쩌면 이 나라에 남은 마지막 대학이 사라지기 전까지 모두가 겪을지도 모를 지독한 학력주의를 나타내는, 입시에서 실패한 순간 반쯤은 열등한 존재로 깎아버리는 사회 구조. 여자의 똑똑함은 남자의 기분을 어느 정도 만족시키는 선에서만 용인할 수 있다는 듯한, 유나가 이십여 년이 넘는 세월을 보아온, 그녀에게는 한없이 관용적인, 그러나 결국에는 그 역시 성인지 감수성이 바닥을 치는 대한민국의 흔한 남성인 아빠의 태도. 그것들은 이해와 체념이 허락되지 않아 유나의 속을 겉잡을 수 없이 메스껍게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것들 속에서 지난 엄마의 시간이 엿보였다. 그녀의 '이유'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엄마가 어린 나이에 결혼을 결심한 이유. 유나와 언니가 썩 좋아하지 않는 아빠의 가족들과 필사적으로 섞이려 했던 이유.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어릴 적 그가 엄마에게 몇 가닥 보였던 '적선' 같은 추억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 동네 어르신이 '아무개 딸'이라 불렀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는 이유. 아빠의 사랑의 듬뿍 받는 자신의 둘째 딸을 가끔 싸늘하게 바라보았던 이유.


"그래서 넌 대학 말고 어딜 가고 싶었는데?  뭐가 하고 싶은데? 고작 빵 굽는 거?"


그녀가 기를 쓰고 유나의 가슴에 차가운 상처를 냈던 이유.




"지연이랑 크리스마스에 남원에 갔었거든. 거기 다리 밑에도 잉어 있었는데. 어디였더라, 춘향이랑 이몽룡 거기."

"광한루?"

"어어, 맞아. 광한루."


입 안 가득 쌈을 씹고 있었다. 옆에서는 엄마의 말이 끊이지 않았다. 유나는 먹느라, 말 들어주느라, 맞장구쳐주느라, 대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것이다. 광한루, 이 세 글자가 순간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은. 엄마의 명쾌한 반문에 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음식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꿀꺽, 하는 순간 그녀의 눈에 스치듯이 보인 것은 엄마의 미소였다. 활짝 갠 아름다운 미소가 아니라 뭐랄까, 픽, 하고 숨이 삐져나오는 그런 미소. 그러니까, 비웃는 것 같은 그런 웃음 말이다. 순간 유나는 그 웃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곧 괜찮아졌다. 엄마가 그랬던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엄마는 유나가 '모른다'는 것에 속상해 하지 않았다. 외려 그것이 기꺼운 듯했다. 즐거운 듯했다. 말하기 좋아하고 이것 저것 설명하기 좋아하는 엄마는 그럴 때면 '이것도 모르니?'하는 표정으로 신이 나서 유나의 무지를 지적하곤 했다. 유나가 진정 모르는 것인지, 답하기 귀찮은 것인지, 까먹은 것인지는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유나는 마치 그 모습이 고등학생 때 만난 얄미운 친구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뭐 저래.


"… 그래서 내가 수상하다는 거야. 걔 사업이 잘 되는 거면 집을 내놨겠어?"

"아니, 뭐, 꼭 사업이 망해야 집을 파나. 사업이 괜찮아서 지금 집이 필요 없는 걸 수도 있지."

"그게 무슨, 참나. 이 사람아, 사업이 잘 되는데 멀쩡한 집을 왜 파나. 요새 집 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그나마 갖고 있는 집도 판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유나가 음식을 더 덜어와 자리에 돌아왔을 때 엄마와 아빠는 때 아닌 논쟁 중이었다. 간간이 듣자 하니 고모가 또 이사를 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아무한테도 자세한 속사정을 말하지 않고 얼레벌레 이사한 모양인데, 이미 여러 번 사기 당한 전적이 있는 고모였기에 아빠는 그 행보가 부쩍 의심스러운 것이다. 게다가 이사한 곳은 월세요, 이사한 지도 두어 달이 다 되어간단다. 아빠와 큰집 식구들은 그걸 이제야 안 거고.


'각이 나오지, 그럼.'


유나는 게살 샐러드를 우물거리며 둘의 대화를 경청했다. 머리로는 고모가 또 사기를 당했구나, 점치면서.


"설령 사업이 잘 됐다 치더라도 월세가 뭐야, 월세가. 저 혼자 사는 것도 아니고.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집들이 미루는데, 안 봐도 뻔해. 변변찮은 데라 나랑 형이 잔소리할 거 아는 거겠지."

"글쎄, 최근에 아가씨 만났을 때는 표정 괜찮아 보였는데. 사업도 그럭저럭 굴러간다고."

"자기야, 자기는 그 말을 고대로 믿어? 제 오빠한테도 숨기는 거를 새언니한테 잘도 솔직하게 말해주겠다."

"사업이 잘 되면 집을 은행에 담보로 잡히고 대출 받아서 확장을 하겠지. 냅다 파는 게 아니라."


유나는 영 답답한 소리에 결국 말을 얹고 말았다. 엄마 아빠 대화에는, 그 중 큰집 식구들 이야기에는 아는 척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큰집 이야기는 워낙 복잡하고 고구마 먹은 것처럼 답답해서 듣다 보면 울화가 터지는 까닭이었다.


유나의 말에 아빠가 지원군을 찾은 듯, 속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유나가 잘 아네. 그러니까 그 집마저 자기 집이 아니었다는 거야. 나 원, 참."


아빠는 단숨에 술을 털어 넣었다. 출구 없이 쳇바퀴를 돌던 이야기에서 드디어 종착역을 찾았다는 듯이. 그리고 유나는 보고 말았다. 엄마의 표정이 차게 식어버리는 것을.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저 표정. 유나가 숱하게 보아왔고, 그녀만이 알 수 있는 엄마의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엄마가 아빠한테도. 언니한테도, 남동생한테도 보여주지 않는. 오직 유나, 자신만이 아는 그 표정.


네가 뭔데 끼어들어.


엄마는 신경질적으로 샐러드를 뒤적였다. 찌푸린 미간은 펴지 않은 채였다. 유나는 괜스레 엄마의 표정을 흘긋, 곁눈질했다. 그냥 입 다물고 있을걸. 엄마는 아빠와의 대화에 유나가 끼는 것을 불편해 했다. 아니, 유나의 감에 따르면 싫어했다. 그것도 아주.


그 맛있던 게살에서 쉰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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