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언팔할께
오십 살 금쪽이를 쓰면서도 여전히 난 sns에 피드하나를 못 올리고 쩔쩔 매고 있다.
왜일까. 내가 원하는 컨셉, 바이브, 컬러톤, 글까지.. 나를 표현하는 이 모든 것을 몇 장의 사진에 담으려고 보니 항상 고민하고 주저하다 쓸 시기를 놓쳐버리곤 한다.
남들에겐 가볍고 쉬운 일들이 나에겐 유독 힘든 일들이 몇 가지 있는데 sns도 그중에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다하는 인스타기에 그저 관망용으로 가끔씩 열어보곤 하는데 이상하게 자주 들어가 보는 피드도 아닌 친했던 그녀의 인스타가 계속 맨 앞 추천으로 떴다.
딸아이 친구엄마로 알게 된 그녀는 나름 본인 업계에서 유명한 워킹맘이었는데 아이들이 어릴 때 바쁜 엄마대신 우리 집에서 먹이고 챙기고 했던 무수한 밥정으로 뭉친 따뜻하고 좋은 추억을 나눈 사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늘 바쁘다는 이유로 무심하고 무뎠고 감정을 표현하는데 투박한 사람이었는데 그때 당시의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마저 이해하며 이 관계를 지속시키고 싶었다.
오랜만에 연락을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나의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닌 떡하니 눌러놓은 작은 하트하나.
음.. 그래 여기까지구나 너와 나의 인연은.
그 사람의 이야기가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은 관계라면 더 이상 관계를 이어갈 이유가 없다.
왜 지금까지 이 사람과 인연을 끌고 왔을까. 그저 나름 유명인이라서? 내 지인리스트 중에 지워버리긴 아까운 사람이기에?
아니다.
늘 표현은 서툴지만 진솔한 친구였고 나름 의리도 있고 본업에 충실한 사람이었기에 그 매력으로 여기까지 마음을 가져온 것이었는데 지금까지 나는 좋은 쪽으로 한쪽만 바라본 거였다.
그녀는 상대에 대한 배려심도 없고 무례했고 다정하지 않은 사람이란 걸 잊고 있었다.
그래,
겉으로 보기엔 멋있고 프로페셔널해 보일지 몰라도 그 속과 안을 들여다보면 다 똑같다는 말, 아니 더 삶의 균형을 맞추지 못하고 살고들 있지 않은가.
SNS가 하이라이트만 보여주는 세상임을, 그곳에 부러워할 것 하나 없는 인간사의 희로애락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스레드에서 어떤 분의 글이 생각난다.
"제가 연락 안 하면 더 이상 인연이 지속이 안 되는 관계가 너무 힘들어요 이젠 이런 인연 다 끊고 싶어요.."
이 글엔 수백 개에 달하는 공감 댓글이 달리고 본인들의 얘기를 성토하느라 대나무숲이 되는 걸 보면서 사람들이 관계의 균형에 대해 얼마나 끝없이 고민하는지 새삼 느꼈다.
나 또한 이어지지 않는 인연에 연연하며 가느다란 실로 이어보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십이란 나이는 이젠 무심히 툭 그 실을 자를 수 있는 용기와 현명함이 있으며 이것이 오십이란 나이가 주는 선택권이다.
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인간관계를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하나는 상대를 온전한 인격체로 대하는 '나와 너(I-YOU)'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를 나의 목적이나 이익을 위한 도구로 대하는 '나와 그것(I-IT)'의 관계라고 했다.
사회적 위치, 외모, 부 등으로 맺어지는 유용성의 우정을 무조건 '가짜'라고 치부할 필요는 없지만 이 관계는 서로의 자원이 시너지를 내며 삶의 기회를 확장하고 비슷한 환경은 대화의 공감대를 쉽게 형성하기도 하지만 조건이 사라지면 관계도 소멸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상대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심리적 허기'가 가시지 않는 인연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소모적인 에너지를 남을 팔로우하는데 쓰지 말고 나를 만드는데 써야 하며 내가 좋아하는 무드에 나의 시선이 머무르는 피드를 만들어 남의 것이 아닌 나를 스스로 팔로우 업 할 수 있는 매력적인 에너지를 만드는데 써야 한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지 마라'라는 이어령 선생님의 말씀처럼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나의 미학이 담긴 피드를 구축하는 것.
그리하여 남이 아닌 나 스스로가 기꺼이 나의 팔로워가 되는 것.
바로 그것이다.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 머물려고 노력하지 마라. 그것은 자신을 잃는 일이다."
— 랠프 월도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