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살 금쪽이
"오늘 내가 보낸 이 24시간이 영원히 반복된다 해도 나는 이 삶을 기꺼이 긍정할 수 있는가?
ㅡ Nietzsche
어느 책에서 마주친 이 문장은 간결했으나 그 뒤에 숨겨진 진실은 묵직했다. 만약 누군가 내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선뜻 "좋아질 것"이라고 답할 수 있을까.
어제와 닮아있는 오늘,
적당한 안락함과 타협한 채 지금의 시간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상상했을 때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그리 찬란하지 않았다.
보통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관성으로 산 무의미하게 흘려보낸 시간이 영원히 반복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저 문장은 삶을 대하는 태도를 수동에서 능동으로 강제 전환시키는 힘이 있다.
또한 '후회 없는 삶'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소함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흔히 '언젠가'를 꿈꾸며 오늘을 유예한다. 더 준비가 되었을 때 더 좋은 기회가 왔을 때 비로소 진정한 내 삶이 시작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 '언젠가'를 위해 오늘의 실행을 미루는 행위는 사실 자신에게 저지르는 가장 안일하고도 뼈아픈 직무유기와 같다.
무언가를 시작하지 않음으로써 내가 무엇을 갈망하는지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확인해 볼 기회조차 박탈하는 것. 그것은 나라는 존재의 가능성을 스스로 거두어들이는 행위다.
내 안의 거인이 어떤 목소리를 내는지 내 손이 어떤 기적을 빚어낼 수 있는지 경험조차 시켜주지 않는 방임은 결국 '나'라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사례의 기한인 66일, 90일, 100일 등 각자의 시간을 보낸 뒤의 인생이 좋아지길 바란다면 오늘의 반복이 축복이 되어야 한다.
오늘 내가 내디딘 작은 발걸음이 비록 서툴고 투박할지라도 그 숫자가 쌓였을 때 거대한 파동이 될 것임을 믿어야 한다. 시작을 망설이며 스스로를 미답지로 남겨두기엔 우리 안에 잠든 금쪽이의 세계가 너무나 방대하다.
그러니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좋아질까?"라는 의문 대신 "좋아질 수밖에 없는 오늘을 살고 있는가?"라고.
나 자신을 방치하지 않고 기꺼이 미지의 영역으로 밀어 넣는 것. 그것이야말로 오늘이라는 시간을 가장 정직하게 책임지는 유일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