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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페이지 성희
Nov 22. 2024
나의 친절한 단골집
자주 가는 곳에서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나다
지나다가 눈에 보인
모델 하우스에
들어갔었다.
처음으로
마음을 설레게 한 아파트
였
다.
구조나 인테리어가
우리가 살았던
신혼집처럼
마음이 설렜다.
설레는 일은
만나기 어렵다.
그렇게
흘려버릴
수 없었
다.
영영 놓쳐 버릴 것만 같았다.
며칠 동안 고민 또 고민을 하고
마음을 정했다.
무모하게 일을
벌인 게 아니었다.
여러 전세살이마다
황당무계 개념 없는
집주인들을
만나 데인
마음이
너덜더덜해져 있었다.
수도권이래도 내 집이면
속 편히 실리라 기대했다.
서울에서 집 장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도권 개발붐으로
서울만큼 아니 서울로
오고 감도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아직은 젊었으니까.
입주하라는
통보에도
우리는
바로
이사하지
못했다
직장인
서울로
어찌
다닐지
결론을 내리지 못
했다.
남편의 직급으로
새벽 회의도 잦았기에
출퇴근이 관건이었고
당분간 시험 거주를 하기로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주말에
펜션처럼
머물렀다.
임대를
줄까도
했다.
오르면
내놓지 싶었다.
갈등이 많았다.
서울에 전세 가격이면
이곳에
집을 샀다.
반년을
주말마다
내려와
지내다가
처음의 계획과 달리
이리
좋은 곳을 남에게
임대하기에
아깝고
말릴
수
없게
새집에
정이
들어가고
있었
다.
언제나처럼
어떻게든
잘 풀려가리라 믿었던
내 젊음의 호기도
있
었
다.
긴 망설임 끝에
우리는
결국
결정을
했
다.
이삿날
폭우
가
내렸다
.
하루 전날 그리 맑은 하늘 안에
저리 물기를 담고
있
었나 싶게
한
주
연기를
했다.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잘될
거야
란
말도
말리
지도
않으셨다
.
덤덤한
얼굴을
하셨다.
도서관 옆 조각상/,본인 사진
그렇게
이사를
하고
가을과 겨울을 맞이하고
봄을
맞이하는 동안
이
낯선 곳이
하나 둘
처음
결정할 때만큼
좋았다.
선택이 옳았다.
항상
첫 번의 시도가
좋은 게
문제인
지 덕분인지 모르겠
다.
그래서
마음도
발도 묶여버렸지만
이 선택으로 또 다른 삶이 열렸다.
서울생활에서
느끼지 못했
던
정겨움을
얻었
다.
맑은 공기로
건강도
좋아졌다.
집에서 5분만 가면 법화산이 있었다.
3
0분만 오르면 정상이었다.
마을 주 도로 옆 논에 아파트가 들어왔다/본인 사진
은행잎 길/ 본인 사진
대학 근처에 살고 싶어 했는데
신학대학이지만 대학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운동장을 돌며 걷고,
농구대에서
농구도 하고
배드민턴도 쳤다.
도서관에서 책도 보고 공부도 했다
신학대 전경
매일 두통약을 두 알씩 먹고
소화불량에 시달리던 게
언젠가 싶게
더 이상
약을 안 먹고 있었다.
주민센타 앞 고목/본인 사인
같은 아파트
입주동기란
이유로
남녀노소 다들
친절하고 다정했
다.
무겁게 들고
가는
장바구니를
보면
등뒤에서
따라
와
말없이
들어주고
함박눈이
펑
펑 내리면
온 동
네 사람들이 전부 나와서
내일 아침 출근하는
가족과
이웃
을 위해
경비 아저씨들과
함께
흐르는
땀을
눈 위에
떨어 뜨리며
태산 같은
눈을 치웠다.
여름밤
물 찬
논에서
퍼지는
개구리
합창
소리 때문에
다들 잠들지
못한 날이면
슬금슬금 한 두 집이
나서서
단지
내 슈퍼에서
맥주를 나눠
마시며
말없이
개구리 우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커피 공작소 카페
토끼장을 만들어서
아이들이
먹이를
챙
겨서
돌아가며
먹이며
토
끼 가족이 늘어가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했고
,
주변에 남는
공터
에
텃밭을 꾸며
상추나 토마토도 심고 키웠다
예쁜 이름표도 세웠다.
.
도서관 옆 조형물
아빠들이 자율 소방대도 만들어
밤늦은 시간
순찰조를
짜서 돌았다
.
연구소 동네니만큼 분위기가 남달랐다.
마을버스가 느리게 오갔고
정류소 아닌 곳에서도
손 흔들면 태워주었다.
회사
셔틀버스가
지나가다 멈춰서
직원이 아니어도
동네로 들어가는 이웃들을
그냥
태워 주기도 했다
서울 농원 지금은 아파트와 도로로 바뀜
나도
모르는
사이
이곳
생활에 적응하고 있었다.
야채나 과일 생선은
주로
단지에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알뜰장에서
해결했다.
특히
야채장수 아주머니는
인정이
넘쳤고 남다른 장사꾼이었
다.
몇 가
지 장을 보면
상추 한 봉지나,
콩나물,
두부
한모라도
한 봉지
쥐어 주
었다.
가격이
얼마가
되든 간에
다른
무언가를
주는
덤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사소한
장사 수완이
아니었다.
장바구니가
푸짐해짐을
넘어
마음이
더
넉넉해졌다.
무언가
사게
되어
도
목요일 장날을
기다렸다
.
가을 은행나무 낭만의 거리
40대에 들어선
헌댁인
나를
새댁
(?)
이라
부르며
듣기 좋은
덕담도
해주셨다.
배추도 즉석에서
쓱쓱
다듬으라고
하
셨다.
집안까지
들고 가서
흙먼지나
푸성귀
쓰레기가 생기지 않게
편히
살라고
하
셨다.
여태까지 이런 장사꾼은 만나지 못했다.
의류가게 사장님도
낯을 익혀 갔다.
칠순이 훨씬 넘어서도
가게를 야무지게
꾸려가셨는데
내게
그 나이가
되니
세상 다 알 거 같지!
아냐
아직 멀었어.
일흔하고 다섯 해
는 넘어야
그제야
알게 돼
하시며 의미심장한 말씀을 주셨다.
이렇게
한동안 넉넉한 마음을
꾸역꾸역
받아넘기며
마음속 깊이
숨겨왔던
서울
태생의
향수병까지 잊게
되
었다.
20년 넘게 살아서 고향같다
그래도 아쉬운 게 있었다.
머리 하기는 해결하지 못한 숙제였다.
미용실 정하기가 어려웠다.
오래도록 다니던 곳을
접
지 못했다.
서울로 다니니 오고 가는
노고와
하루란
시간을
꼬박
소비했다
.
돌아오는 길이 고단해졌다.
서울행이
점점
반갑지
않고
꾀가 났다.
단골로 다니던 미용사가
이젠 그곳에서 미용실을 찾아보라고
시원섭섭한
얼굴로
당부했
다
그때쯤
눈에 들어온
미용실이 있었다. 퇴근할 때마다
정류소 앞에
훤히 불에 켜져 있었고,
손님들로
남아 있는
미용실이
었다.
저녁
8시가
넘었으면
도심 미용실도 마감을
할 시간인데
언제나 그곳은 달랐다.
어느 날,
용기를
내었
다
원
장님
은
단아하고
웃음
가득한
얼굴의
60대
아주머니셨다.
보조도 없이 혼자서 미용실을 운영했다.
동네 작은 미용실임에도
예약을
해야
한다
했
다.
자기만의
기준과 원칙이
있었
다
.
여기를 계속 다녀야겠다고
마음먹기 시작했
다
.
어느 날 원장님이
이곳에 정착한 사연을 읊조리셨다.
분당에
한
동네에서
자리 잡아
제법
알차게
미용실을 꾸려가
는데
대기업
통신회사에
다니
던
남편이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
가계는 아내가 꾸려도 넉넉하니
그런 미용사 아내를 뒷배로
사업을
벌인 거다.
처음엔 곧잘 되더니
결국
빚을 지고
이자까지
갚지 못할 지경에 다다르게 되었다.
미용실을 처분하고
빚잔치를 한 후
새롭게 자리 잡은 곳이
여기였다.
더구나 술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는터라
종종 술자리에
가면
차를 놓고
택시로 귀가하셨단다
그날도 새벽 1시에 같이 사는
딸애에게
데려오라고 했다
거기까지 듣던 지인 중에 한 분이
미운 놈이 미운 짓 골라한다고
자고 있는 가족을
오밤중
에
깨워 데려오라냐고 나무라자
갑자기 원장님이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우리는 모두 놀랬다.
가족이 외출해서 택시도
안 잡혀
발을 동동 굴리며
못 들어오는데
당연히 맞으러 나가야지
거기에 미운 놈이
어딨
고
이쁜 놈이
어딨냐며
화내셨
다.
뻘쭘해진 지인은
입 꾹
하고
얼굴까지
빨개지셨다.
그렇지 않은가!
허물은 허물이고
잘못이 있다 해도
각각은 별개의 일이고,
더더욱 남의 가정사를
본인도 아닌데 뭐라
비난할 수 없는 거다.
어떤 경우라도 내 남편을 옹호하는 게
내 자존심을 지키는
일인 거다.
감정에 휩싸여 남이 나를 감싸주는 게
사실 돕는 게 아니다.
한순간은 좋을지 모르나
그 순간
이
지나면 부끄러운 일이다.
한마디로 내 얼굴에
침 뱉
기다
이혼한 사이래도 그건
아닌 거라 했다..
또 한
가지 이분은
아
무리
친하고 가까워도 손님은 손님이지,
친구도, 동생뻘도 아니다
일로
만난 사이는
깍듯하게 대한다.
밥벌이
생계이기에
손님을
소중히 여길 줄 안다.
한결같이 최선을 다하신다.
갈 때
도
머리 숙여
"
감사
합니다
,
안녕히 가세요
"
정중히 인사하신다.
내
가 좋아하는 한결같음과
사람을
대함에
위아래 구별 없이
정중함이 마음에
들었
다.
나의 친절한 단골은
새로운 선택으
로 만났다.
이분들 덕에 낯선 곳에서
마음을 안착하고
살고 있다.
이
분들이 날 찾아와서
위로가 되어주고
토닥토닥
마음을 붙이게 해 주었다는 건
그분들도
모르실 것이다.
아니 그분들이
도움을 주셨으리라
하는 건
내
믿음이나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삶의 여러 경로에서
만난 사람에게
따스한 말 한마디를
의미 있게 받고
소중함을 마음에 새김도
가치 있는 일이었다.
이 길을 따라 가면 제 2의 고향 살던 집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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