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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완벽한 시골 입성기

사는 곳에서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나다

by 페이지 성희



지나다가 눈에 띈 모델 하우스에 들어갔다.

집을 보는데 마음이 설레었다.

구조나 인테리어가 마치 신혼집처럼 아기자기한 게 좋았다.

살며 설레는 일은 만나기 어렵다.

그렇게 흘려버릴 수 없었다.

지나치면 영영 놓쳐 버릴 것만 같았다.

며칠 동안 고민 또 고민을 하고

마음을 정했다.


어찌 보면 무모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마냥 무모한 일은 아니었다.

여러 해 전세살이에서 황당무계한

소유자들을 만나 데인 마음이 너덜더덜해져 있었다.

수도권이래도 내 집이면 속 편히 실리라 기대했다.

결혼 후 5년 만에 이룬 내 집 마련 입성이다.

가장 큰 문제였던 서울로 출퇴근도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아직은 젊었으니까.


입주하라는 통보에도 우리는 바로 이사하지 못했다

남편이 새벽 회의도 잦았기에

출퇴근이 관건이었고 당분간 시험 거주를 하기로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주말에 와서 펜션처럼 머물렀다.

임대를 줄까도 했다.

오르면 내놓아 팔아볼까 싶었다.

정말 갈등이 많았다.


반년을 주말마다 내려와 지내다가

처음의 계획과 달리 이리 좋은 곳을 남에게 임대하기에 아깝고

말릴 수 없게 집에 정이 들어가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어떻게든 문제를 잘 풀어가리라 믿었던 오만하고 무모한 젊음의 호기도 넘쳤다. 무식해서 용감했다.


긴 망설임 끝에

우리는 결국 결정을 했다.


이삿날 폭우가 내렸다.

하루 전날 그리 맑은 하늘 안에

저리 물기를 담고 있었나 싶게 쏟아지고 넘쳐서 이삿짐 업체에서

한 주 연기를 권했다.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잘될 거 말도 말리지도 않으셨다. 덤덤한 얼굴을 하셨다. 말려도 듣지 않을 내 고집을 아셨다


그렇게 이사를 하고 가을과 겨울을 맞이하고 봄을 맞이하는 동안

이 낯선 곳이 하나 둘 처음 결정할 때만큼 좋아졌다.

선택이 옳았다. 항상 첫 번의 시도가 문제인지 덕분인지 모르겠다.

마음도 발도 묶여버렸지만

이 선택으로 또 다른 삶이 열렸다.


우선 서울생활에서 느끼지 못했던

정겨움을 얻었다.


맑은 공기로 건강도 좋아졌다.

집에서 5분만 가면 법화산이 있었다.

40분만 오르면 정상이었다.

마을 주 도로 옆 논에 아파트가 들어왔다/본인 사진
은행잎 길/ 본인 사진

대학 근처에 살고 싶어 했는데 신학대학이지만 대학이 있었다.

매일 아침 운동장을 돌며 걷고, 주말에는 애들과 농구대에서

볼넣기 시합도 하고 배드민턴도 쳤다. 도서관에서 책도 보고 시험공부도 했다

신학대 전경
주민센타 앞 고목/본인 사인

같은 아파트 입주동기란 이유로

남녀노소 다들 소박하고 다정했다. 무겁게 들고 가는 장바구니를 보면 등뒤에서 따라와 말없이 들어주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면 온 동네 사람들이 전부 나와서 경비

아저씨들과 함께

흐르는 땀을 눈 위에 떨어 뜨리며

태산 같은 눈을 치웠다.

초여름밤 소쩍새 울움, 물이 가득 찬 논에서 퍼지는 개구리 합창 소리에 "다정도 병인 양 잠못들어 하노라."

옛 시인의 싯귀처럼 다들 쉽게 잠못들어 했다.

밤새 고요속에 퍼지는 개구리 우는 소리에 말없이 귀기울였다. 단지 한구퉁이에 토까도 키웠다.

아이들이 돌아가며

당근이나 배추 같은 먹이를 챙겨서 키웠다.

토끼 가족이 늘어가는 신비함을

눈으로 체험했다.


주변에 공터에 텃밭을 꾸며

상추나 토마토도 심고 키웠다

텃밭에 예쁜 이름도 지어 이름표도 세웠다..

아빠들이 자율 소방대도 만들어

밤늦은 시간 순찰조를 짜서 돌았다.

연구소 동네니만큼 분위기가 남달랐다.


마을버스가 느리게 오갔지만

정류소가 아닌 곳에서도 손을 흔들면 세워서 태워주었다.


회사 셔틀버스가 지나가다 주민들이 보이면 멈춰 섰다. 직원이 아니어도 동네로 들어가는 이웃들을 그냥 태워 주었던 거다.

입주초기에는 서울에서 경험하지 못한 정 깊음의 연속이었다.

서울 농원 은 아파트와 도로로 바뀜

나도 모르는 사이 이곳 생활에 적응하고 있었다.

야채나 과일 생선은 주로 단지에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알뜰장에서 해결했다.

특히 야채장수 아주머니는

유난히 인정이 넘쳤고

남다른 장사꾼이었다.


몇 가지 장을 보면 상추나, 콩나물, 두부 한모라도 쥐어 주었다.

가격이 얼마가 되든 간에 다른 무언가

덤을 준다는 게 신기했다.

사소한 장사 수완이 아니었다.

장바구니가 푸짐해짐을 넘어

마음이 더 넉넉해졌다.

무언가 사게 되어도

목요일 장날을 기다렸다.

가을 은행나무 낭만의 거리

40대에 들어선 헌 댁인 나를 새댁(?)이라 부르며 듣기 좋은 덕담만 해주셨다.


배추나 김칫거리는 장터에서 쓱쓱 다듬으라고 하셨다.

집안까지 들고 가서 흙먼지나

푸성귀 음식물 쓰레기가 덜 생기게 편히 살라고 일러 주셨다. 여태까지 이런 장사꾼을 만나지 못했던 거 같다.


의류가게 사장님도 낯을 익혀 갔다.

칠순이 훨씬 넘으셔도 가게를

야무지게 꾸려가셨는데 내게

"그 나이가 되니 세상 다 알 거 같지? 아냐 , 아직 멀었어.

일흔하고 다섯 해는 넘어야

그제야 알게 돼."

하시며 의미심장한 말씀을 건네주셨다. 그분 권유 덕분에 살도 뺐다.

아쿠아 에어로빅과 수영으로 10킬로나 감량한 적도 있다. 잠시 몇 해 곧잘 유지했지만 ㅠㅠ


이렇게 한동안 이웃들의 넉넉한

마음을 꾸역꾸역 받아넘기며

마음속 깊이 숨겨왔던

서울 토박이로 살던 도시를

그리워하던 향수병까지 잊게 되었다.


20년 넘게 살아서 고향같다

아직 해결 하지 못한 건 한 가지 미용실이 문제였다.

아직도 머리는 기존 살았던 곳에 가서 해야 했다.

하지만 점점 서울행이 반갑지 않고 꾀가 났다. 단골로 다니던 미용사가 이젠 그곳에서 미용실을 찾아보라고 시원섭섭한 얼굴로 당부했다


그때쯤 눈에 들어온 미용실이 있었다. 퇴근할 때마다 미용실 앞 정류소에서

보이는 불이 훤히 켜져 있던 곳이었다.

저녁 7시가 넘었으면 도심 미용실도 마감을 할 시간인데 언제나 그곳은 달랐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들렸다.

원장님은 단아하고 소박한 미소를

얼굴의 60대 아주머니셨다.

보조도 없이 혼자서 미용실을 운영했다.

동네 작은 미용실임에도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단골이 많았다. 자기만의 기준과 원칙에 엄격한 분이셨다.

여기를 다녀도 좋겠다는 마음이 나도 모르는 새 저절로 들었다.


어느 날 원장님이 이곳에 정착한 사연을 읊조리셨다.

분당에 한 동네에서 자리 잡아

제법 알차게 미용실을 꾸려가는데

대기업 통신회사에 다니던 남편이

잘 다니던 회사를 조기 퇴직하고 퇴직금과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친구와 사업을 벌이셨단다.

당분간 생계비는 아내 벌이로

꾸려가고 미용사 아내를 뒷배로

자신의 뜻을 펼쳐보려 했던 거다.


평생 남 밑에서 주어진 일만

하던 분이 스스로 감당해야

책임의 무게는 감당할 범위를 넘어갔다. 경험부족, 친구의 배신, 관리자로서의 역량을 감당하지 못한데다가 빚의 무게는 늘어갔.

사업을 접음과 동시에 집도 날리고 아내의 미용실 보증금까지 빚잔치로 정리한 후 새롭게 자리 잡은 곳이 여기였다.


더구나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남도 사람다운 푸근한 정서를 지니신 터라 종종 술자리에 길어지면 새벽이 되기 일쑤였다.

전날도 새벽 1시에 택시도 잡히지 않고 길바닥에서 헤매다가 이웃에 사는 딸에게 데려오라고 전화를 하셨단다


거기까지 듣던 손님 중에 한 분이

미운 놈이 미운 짓 골라한다고

자고 있는 가족을 오밤중에 깨워서 데려오라냐며 나무라자 갑자기 원장님이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우리는 깜짝 놀랐다.


식구가 나가서 오밤중에 택시도 안 잡혀 발을 동동 굴리며 속이 얼마나 탔겠냐 당연히 맞으러 나가야 하지 거기에 미운 놈이 어딨고 이쁜 놈이 어딨냐며 벌컥 화를 내셨다.

뻘쭘해진 그분은 입을 꾹 다물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렇지 않은가!

허물은 허물이고 잘못이 있다 해도 각각은 별개의 일이고,

더더욱 남의 가정사에다 본인도 아닌데 콩이니 팥이니 시시비비를 다투며 왈가왈부할 수 없는 거다.


어떤 경우라도 내 남편을 옹호하는

게 맞다. 내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기에 남이 위로한들 감싸주는 게 어찌보면 위로하는 게 아니다.

내 남편을 나는 욕해도 나외에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일이다.

한마디로 내 얼굴에 침 뱉기라 생각하셨을 거다.

물론 아직까지 가장으로서 책임질 일은

모두 아내인 자신의 몫이 되었어도 종교의 힘으로 꿋꿋이 사신다.

또 한 가지 이분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무리 친하고 가까워도 손님은 손님이지, 친구도, 동생도 그 누구도 아니라며 행동한다.

일로 만난 사이는 선을 지키고 깍듯하게 대한다.

밥벌이 생계에 손님을 소중히

여길 줄 안다.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최선을 다하시고 예의를 지킨다.

갈 때도 머리 숙여

"감사합니다 , 안녕히 가세요"

정중히 인사하신다.

내가 좋아하는 한결같음과

사람을 대함에 위아래 구별 없이,

차별 없이 정중함이 마음에 들었다.


이분들이 어느 날부터 나비처럼

날 찾아와서 멀리 계시는 어머니처럼

위로를 주고 토닥토닥 도닥이며

여기 타향에 마음을 붙이게

해 주었다는 건 이분들도

모르실 것이다.


아니 그분들이
도움을 주셨다는 것은
어쩌면
나만의
믿음이나 착각일지도 모른다.



이 길을 따라 가면 제 2의 고향 살던 집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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